[제주여성 문화유적100] (67) 동일1리 정난주 마리아묘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정난주 마리아의 묘 ⓒ제주의소리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최악의 유배지는 제주도였다. 중죄인인 경우 도성에서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강토가 좁아 도성에서 가장 먼 곳이 거친 바다를 사이에 둔 제주도였다. 이 최악의 유배지에는 신분이 귀한 여성들도 귀양을 왔는데 집안이 정쟁에 휘말린 경우였다.

대정읍에는 천주교제주교구가 1994년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성역화한 정난주마리아 묘가 있다. 정난주는 대정읍에 유배되어 죽을 때까지 제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외아들의 안위를 기도하다가 숨진 조선 말기의 독실한 천주교인이다. 제주도로 오던 중 태풍을 피해 추자도에 들렀을 때 강보에 싸인 젖먹이 아들을 관헌들 몰래 바위틈에 놓아두고 떠나야만 했던 그 안타까운 상황.

“하늘이여, 이 죄 없는 어린 것을 살려 주소서!”

그 절박하고 안타까운 모성애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저리게 한다.

정난주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약용의 형, 정약현의 딸로 1773년 태어났다.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고, 정난주의 남편 황사영도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고 전교활동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주문모 신부에게 보냈는데 관헌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황사영백서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때 수많은 천주교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참수 되었으며 부인 정난주에게는 제주목 관노로 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을 품에 안고 유배길에 올랐는데 대역죄인의 아들이기에 언젠가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음의 마수로부터 구할 방도만을 생각했다. 그녀가 추자도 바위에 숨겨놓은 아들, 손을 모아 하느님의 가호를 간절히 빌었던 그 아들은 고기잡이를 다녀오던 오씨 어부가 아기의 지친 울음소리를 들음으로써 극적으로 발견 되었다. 아기는 추자도에서 성장하여 어부가 되었고 먼 훗날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로 밝혀져 이름을 황경한으로 개명했다. 황경한의 묘는 현재 추자도의 바닷가 언덕에 있다.

정난주는 제주목에서도 가장 척박한 곳인 대정읍의 관노가 되어 온갖 조롱과 멸시를 겪으면서도 천주님이 주는 시련이라 여기며 끝까지 품격을 잃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따뜻한 인간애와 풍부한 교양과 학식은 주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나이가 들자 사람들은 그녀를 ‘서울할망’이라고 부르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가 기댔다. 이후 1838년 2월 1일 병으로 숨을 거두자 이웃들이 이곳에 안장하고 벌초를 해왔다. 이 곳에 와서 잠시 혼란스러운 건 성역화를 한다면서 나지막하고 정답던 무덤을 너무 규격화해 버렸다는 점이다. / 김순이

찾아가는 길 - 보성리 농협 4거리 → 모슬포방향으로 200m → 한라산 쪽으로 직진 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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