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몽골의 탐라목장 중심 개편

▲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김일우·문소연

1295년(충렬왕 21) 제주의 행정단위가 제주목(濟州牧)으로 개편됩니다. 당시 고려의 목(牧)은 오늘날의 도(道)와 같은 위상을 지닌 최상급 지방행정단위였습니다. 더불어 제주는, 수령층 목사(牧使)[3품 이상]와 부사(副使)[4품 이상] 그리고 속관층(屬官層)에 해당하는 판관[6품 이상], 사록참군사(司祿參軍事)[7품 이상], 장서기(掌書記)[7품 이상, 사록참사군 겸직], 법조(法曹)[8품 이상], 의사(醫師)[9품], 문사(文師)[9품] 등 7명의 외관층을 맞게 됩니다.

몽골의 직할령이 되기 이전의 제주가 가장 많은 외관을 맞이하고 높은 읍호를 지녔던 때는 1223년(고종 10)부터 1273년(원종 14)까지였습니다. 그 기간 중에는 수령 부사(副使)[6품 이상], 속관층에 해당하는 판관[7품]과 법조[8품 이상] 등 3명의 외관이 왔었습니다. 그때 제주사회는 이 3명의 외관이 제주관아에 참여한 성주, 왕자 등과 같은 토착세력과 더불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1295년 제주목으로 개편되고 7명의 외관이 파견된 것은, 제주사회의 규모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1300년(충렬왕 26)에는 제주의 행정단위가 분화·확대되어 개편됐습니다. 이때 제주지역은 제주목에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신촌, 함덕, 김녕, 토산, 호아(弧兒)[남원읍 신·하례리] 등의 현(縣)이, 서쪽으로는 귀일, 고내, 애월, 곽지, 명월, 차귀[한경면 고산리], 산방[안덕면 일대], 예래, 홍로[서귀포시 서·동홍동] 등의 현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이미 1211년(희종 7)에 생겨난 귀덕현이 합해져 제주지역의 행정단위는 주현主縣 제주목과 주현의 관할을 받는 속현(屬縣) 15개 현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시의 명칭 가운데 다수가 지금까지 제주 행정단위의 호칭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주지역의 행정단위가 제주목에 중심을 두고 동·서 방향의 15개 현으로 분화·확대된 것은 동·서 방향에 몽골의 탐라국립목장이 위치했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인해 제주사회의 경제력과 인구 등의 규모가 이전보다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이 가져온 탐라목장의 설치 등으로 이루어진 제주사람들과 몽골족의 교류는 제주사회 규모를 확대시켜 행정단위의 개편을 불러일으킨 요인으로 작용했고, 이때의 개편이 조선시대를 이어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는 제주 행정단위의 모태가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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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사, 국제적 사찰로 중창되다

▲ 법화사지 ⓒ김일우·문소연

불교가 언제 제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제법 널리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수정사,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원당사 등의 사찰이 고려 때 제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몽골과 관련이 있는 사찰은 법화사와 원당사입니다. 특히 법화사는 몽골이 매우 공을 들인 사찰이었습니다.

▲ 법화사지 출토 운용문 막새 ⓒ김일우·문소연
법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 때 출토된 유물로 1269년(원종 10)부터 1279년(충렬왕 5) 사이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법화사 중창이 시작된 1269년은 몽골이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기 4년 전이고, 마무리된 1279년은 직할령으로 삼고 5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중창시기와 발굴유물로 미루어, 중창은 고려왕실의 착안으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추진과 마무리는 몽골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법화사의 관음신앙은 고려 왕실이 신봉하던 종교였습니다. 고려 왕실은 국가 평화와 왕권강화를 위해 몽골

▲ 법화사지-출토-명문기와 ⓒ김일우·문소연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법화사 중창을 계획하고 시작했지만 원종 폐립과 복위, 삼별초 대몽항쟁 등 급격한 정세변동으로 추진이 지지부진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몽골이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 황실 역시 관음신앙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에 파견한 자국민에게 종교적 안식처를 마련해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고, 제주를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경영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화사가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인 제주서남부 해안지대로부터 가까운 자리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중창 이후 법화사는 몽골 황실의 원찰願刹이었으며, 제주에 파견되어 거주했던 상당수 몽골족이 찾는 종교적 안식처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법화사는 제주가 한 때 고려에 환속됐던 충렬왕 20~26년(1294~1300)사이에는 고려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도 지정됩니다. 고려 때 비보사찰은 국운융성과 왕실번영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적 차원의 각종 지원을 받았습니다. 비보사찰로서의 위상이 몽골지배로 인한 제주사회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법화사에는 몽골족뿐만 아니라 그들과 혼인한 제주여성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그리고 토착주민들까지도 신앙생활을 위해 찾아갔을 것입니다. 상당히 높은 위상을 지닌 복합적인 사찰로 번성해 나아갔던 것이지요.

사찰로서의 위상을 매개로 법화사는 몽골의 제주사회 지배를 뒷받침하는 관아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몽골황제 순제가 1366년(공민왕 15) 무렵부터 탐라에 짓기 시작했다는 피난궁전 터도 법화사 경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현 법화사내 구화루와 구품연지 ⓒ김일우·문소연

▲ 현 법화사 대웅전 ⓒ김일우·문소연

결국 법화사는 호국불교를 내세운 고려와 몽골의 국가적 입장이 중첩된 국제적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몽골이 지배했던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간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제주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에서 비롯된 법화사의 존재와 위상 역시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직접적이며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주문화에 몽골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지요.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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