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사, 타향살이 몽골족의 종교적 안식처
법화사, 타향살이 몽골족의 종교적 안식처
  • 김일우·문소연 (-)
  • 승인 2011.05.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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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몽골을 만나다] 법화사, 국제적 사찰로 중창되다

▲ 법화사지 발굴현장 ⓒ김일우·문소연

불교가 언제 제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제법 널리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수정사,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원당사 등의 사찰이 고려 때 제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몽골과 관련이 있는 사찰은 법화사와 원당사입니다. 특히 법화사는 몽골이 매우 공을 들인 사찰이었습니다.

법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 때 출토된 유물로 1269년(원종 10)부터 1279년(충렬왕 5) 사이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법화사 중창이 시작된 1269년은 몽골이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기 4년 전이고, 마무리된 1279년은 직할령으로 삼고 5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중창시기와 발굴유물로 미루어, 중창은 고려왕실의 착안으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추진과 마무리는 몽골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법화사의 관음신앙은 고려 왕실이 신봉하던 종교였습니다. 고려 왕실은 국가 평화와 왕권강화를 위해 몽골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법화사 중창을 계획하고 시작했지만 원종 폐립과 복위, 삼별초 대몽항쟁 등 급격한 정세변동으로 추진이 지지부진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몽골이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 황실 역시 관음신앙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에 파견한 자국민에게 종교적 안식처를 마련해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고, 제주를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경영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화사가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인 제주서남부 해안지대로부터 가까운 자리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 옛 법화사지터 대형 주초석 ⓒ김일우·문소연

중창 이후 법화사는 몽골 황실의 원찰(願刹)이었으며, 제주에 파견되어 거주했던 상당수 몽골족이 찾는 종교적 안식처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법화사는 제주가 한 때 고려에 환속됐던 충렬왕 20~26년(1294~1300)사이에는 고려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도 지정됩니다. 고려 때 비보사찰은 국운융성과 왕실번영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적 차원의 각종 지원을 받았습니다. 비보사찰로서의 위상이 몽골지배로 인한 제주사회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법화사에는 몽골족뿐만 아니라 그들과 혼인한 제주여성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그리고 토착주민들까지도 신앙생활을 위해 찾아갔을 것입니다. 상당히 높은 위상을 지닌 복합적인 사찰로 번성해 나아갔던 것이지요.

사찰로서의 위상을 매개로 법화사는 몽골의 제주사회 지배를 뒷받침하는 관아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몽골황제 순제가 1366년(공민왕 15) 무렵부터 탐라에 짓기 시작했다는 피난궁전 터도 법화사 경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결국 법화사는 호국불교를 내세운 고려와 몽골의 국가적 입장이 중첩된 국제적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몽골이 지배했던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간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제주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에서 비롯된 법화사의 존재와 위상 역시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직접적이며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주문화에 몽골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지요.

<관련유적 둘러보기>

몽골 기황후의 전설이 어려 있는
원당사지오층석탑

▲ 불탑사오층석탑 ⓒ김일우·문소연

삼양동 원당오름 기슭으로 조금 올라가 ‘불탑사’라는 사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찰 정문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길이 4m의 제법 큰 석탑 하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어 있는 ‘불탑사오층석탑’입니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 이래 제주의 3대 대표사찰의 하나였던 ‘원당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옛 사람들에게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당사는 몽골제국에 공녀(貢女)로 끌려갔다가 황후자리까지 오른 고려출신 기씨奇氏가 세웠다고 합니다. 이야기 내용이 그럴 듯합니다. 태자가 없어 고민하던 기황후에게 어느 날 승려가 비법을 알려줍니다.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에 절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천하를 두루 살피다가 원당봉을 적지로 보고 공을 들여 황태자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감사로 원당사를 창건토록 했다는 겁니다.

▲ 불탑사 오층석탑 ⓒ김일우·문소연

▲ 원당사지 표지석 ⓒ김일우·문소연

석탑이 전체적으로 고려후기 석탑의 축조양식을 연상케 하고, 원당사터 발굴조사 때 고려시대 건물지와 도자기 조각 들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원당사와 석탑이 기황후와 관련을 맺어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좀 과장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창건 시기는 몽골의 제주지배기였고, 창건을 주도한 집단은 몽골족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당사지오층석탑은 제주에서 흔히 보는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서인지 소박하고 낯설지 않은 느낌입니다. 현무암은 제주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돌인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불탑은 세계에서 이 석탑이 유일하다는군요. 그만큼 이 석탑은 제주의 토착성을 강하게 담은 독특한 문화유산입니다. 외부문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과 조응하며 수용하고 정착시켜온 제주문화의 단면을 엿보게도 합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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