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광 주민 100여명은 왜 '큰넓궤'에 숨었을까?

2013-03-28     이승록 기자

영화 '지슬'이 연일 화제다. 제주4.3의 아픈 역사를 담은 지슬이 세계적인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후 전국 언론에서 중요하게 보도되고 있다. 4.3을 부정적으로 다뤘던 보수언론부터 연예전문 인터넷뉴스까지 영화 '지슬'을 보도하며 제주4.3을 얘기한다. 독립영화에서 1만명이 본다면 상업영화는 100만명이 본 것에 가깝다고 한다. 지슬은 4만명을 돌파했다. 400만명이 본 것이나 다름없다. 지리멸렬하고, 통과의례적인 것으로 치부된던 제주4.3이 '지슬'이라는 단한편의 영화로 전국화, 세계화되고 있다. 좌우의 이념대립의 시대에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조명한 '지슬'은 직접 4.3을 겪은 백발이 성성한 70~80대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극장을 찾게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가 '4.3을 말한다'<5권>를 토대로 65주기 제주4.3을 맞아 '지슬'의 압축된 내용을 풀어내기 위해 4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지슬로 본 제주4.3] ① 초토화작전으로 무차별 학살...중산간 주민들, 목숨 부지 위해 대피

▲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입구.
영화 '지슬'의 무대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다. 동광리는 제주지역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로 65년 전에는 '무등이왓' '삼밧구석' '조수궤' '간장'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무등이왓이 가장 많은 80~100가구가 살았고, 삼밧구석 40여가구, 조수궤 10~15가구, 간장이 가장 작은 5가구가 살았다.

1948년 4월3일 첫 무장대의 봉기한 이후 11월까지 간헐적인 무장대와 토벌대의 충돌이 있었지만 동광리 주민들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하지만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1948년 10월17일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통행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떨어지면서 대학살이 펼쳐지는 장소가 된다. 

포고령이후 12월까지 주민 소개령과 동시에 중산간 마을 방화와 무차별 학살이 벌어진다. 마을을 불태우고, 소개하는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동광리 주민들이 피해도 이 시기에 집중된다.

▲ 4.3 당시 큰넓궤에서 대피 상황을 설명하는 홍춘호(76) 할머니와 신원숙 할아버지(80). 사진 오른쪽은 동광리장 강경주씨.
사실 해안가 마을과 떨어진 동광리에 사는 주민들은 '포고령'과 '소개령'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주민 대다수가 그대로 마을에 살고 있었다.

최초의 동광리 주민 학살 사건은 11월15일에 나타났다. '무등이왓'을 포위한 군경토벌대가 이날 새벽 연설을 하겠다며 주민들을 무등이왓 중심 밭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집결하자마자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마을의 어른들이라고 할 수 있는 50~60대 주민 10여명을 총살했다. 특히 현직 경찰의 부친까지 토벌대가 학살해 마을 주민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속칭 '무등이왓 학살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마을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고, 숨어지내기 시작했다. 각 마을마다 토벌대의 출현을 알기 위해 '망'을 보기 시작했고, 낮에는 동굴로, 밤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토벌대가 마을 인근 주변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숨어있던 주민들을 발견하면 곧바로 온갖 매질에 '총살'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주민들이 발각돼 희생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동광리 첫 학살이 일어났던 현장을 신원숙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있는 모습.
현재 동광리 마을이장인 강경주씨(44)는 "당시 토벌대의 수색으로 마을 인근에서 숨어지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 아버지 2분과 고모 등 5명이 모두 토벌대에 학살됐다"며 "다행히 아버지만 해안가 마을로 내려와 있어서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을 주변 토벌대의 수색이 강화되고, 발각되면 무차별적으로 총살되면서 주민들은 더욱 안전한 곳으로 찾아 마을에서 2~3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다. 그곳이 바로 도너리오름 남사면에 있는 '큰넓궤'다.

당시 15살이었던 신원숙(80) 할아버지는 큰넓궤로 마을주민들이 옮겨간 사연에 대해 자세하게 증언했다.

신 할아버지는 "9연대 군인들과 이북 말씨를 쓰는 서북청년단이 1948년 11월 중순이후 초토화작전을 하며 숨어있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내 무차별 학살을 했다"며 "그래서 무등이왓 주민들은 '일제시대부터 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다는 좋은 은신처라고 소문이 난 큰넓궤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신 할아버지는 "큰넓궤에는 이미 삼밧구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숨어 있었다"며 "무등이왓 주민까지 합치면 100명 이상 족히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초입부분. 한 사람씩 낮은 포복을 해야 움직일 수 있다.
<제주의소리> 취재진이 마을이장과 생존자인 신 할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큰넓궤는 도너리 오름 남사면 곶자왈로 변한 마을공동목장에 위치해 있었다.

큰넓궤의 전체 길이는 180m일 정도로 크고 넓은 동굴이지만 얼핏보면 도저히 100명 이상은커녕 5명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실제로 영화 지슬도 큰넓궤에서 촬영하고, 보조촬영지로 조천읍 선흘리 반시못굴에서 촬영했다.

큰넓궤는 굴 입구에서 10m까지는 한사람씩 낮은 포복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어 2m 높이의 낭떠러지를 다시 내려가서 10m 이상 지나면 높이 2m에 90여㎡의 공간이 나왔다. 입구에서 가까운 넓은 공간에 삼밧구석 주민들이 자리를 잡았고, 뒤늦게 들어온 무등이왓 사람들은 더 깊숙한 곳에 들어가 숨었다.

취재진이 찾은 둥굴 속에는 깨어진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등 65년 전 마을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했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큰넓궤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만한 곳이었지만 동광리 주민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동굴이여서 12월과 1월의 추위를 녹일 수 있었고, 누가 알려주지 않는 한 무엇보다 악귀같은 토벌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동광리 주민들은 토벌대에게 굴이 발각되기 전까지 40여일 이상 큰넓궤에서 숨어 살았다. 당시 11살이었던 홍춘호(76) 할머니는 "지슬이나 감저(고구마) 등을 먹으며 40여일간 버텼다"며 "낮에는 목소리가 혹시 새어나갈까봐 숨을 죽이고 지냈다"고 말했다.

큰넓궤가 토벌대에게 발각되는 것은 1949년 1월20일께. 굴 밖에서 잡힌 사람이 '사람이 많이 숨은 곳을 알려주면 살려주겠다'고 위협하자 토벌대에게 큰넓궤를 알려줬다.

다행히 영화처럼 주민들이 큰넓궤에서 고춧가루와 이불을 태워 토벌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기지를 펼쳤고, 마침 날이 어두워지자 토벌대가 바위로 동굴을 막고 떠났다.

▲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에 4.3 당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깨진 그릇들.
도너리오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동굴을 막은 바위를 치워주자 1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밤새워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으로 이동하다고 한겨울 싸인 눈 위에 난 발자국 때문에 토벌대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1월22일 정방폭포 부근으로 끌려가 다른 마을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인원은 86명이며, 동광리 주민만 22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큰넓궤에 숨어 있던 신 할아버지와 홍 할머니는 볼레오름이 아닌 무등이왓 인근 '미오름'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신 할아버지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볼레오름으로 도망가다 토벌대에 잡혔지만 우리 가족은 멀리가지 않고 무등이왓 근처 미오름에 숨었다"며 "다행히 계엄령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다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4.3으로 인해 희생된 동광리 주민은 전체 주민의 5분의 1 정도인 153명. 대부분 초토화작전 시기에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다.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사체는 바다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은 10년이 지난 1959년 동광유거리와 삼밧구석 인근에 '헛묘'를 조성해 넋을 위로하고 있다. 

영화 '지슬'은 초토화작전 시기 '동광리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지만 제주도 중산간 마을은 대부분 동광리와 비슷한 비극을 겪었다.

4.3 당시 무등이왓이 동광리 최대 마을이었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 표석만 남아 있다. 재건된 동광리 주민들이 대부분 살고 있는 지역은 그 당시 가구수가 가장 적었던 '간장'지역이다.

무등이왓처럼 초토화작전으로 제주 중산간마을은 100여곳이 '잃어버린 마을'이 나올 정도로 제주도민의 희생은 엄청났다.

죽이고, 불태우고, 없애는 초토화작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광리 주민들은 큰넓궤로 숨어 들어갔던 것이다.

# 정정합니다.  '지슬' 촬영을 큰넓궤에서 하지 못했다는 부분은 잘못된 내용입니다. '지슬' 스탭진에게 정중한 사과를 드립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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