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벌겅했주. 어린 건 죽은 어멍 젖빨고..."

2013-03-29     문준영 기자

[지슬로 본 제주4.3] ② 65년만에 큰넓궤 찾은 홍춘호 할머니, 열한살 꼬마가 이젠 일흔여섯 노인 

▲ 홍춘호 할머니가 큰넓궤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는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일흔여섯살이 됐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토벌대의 무등이왓 학살 이후 동광리 마을 사람들은 동네 근처 작은 ‘궤’에 숨어지냈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던 그 때를 홍춘호(76) 할머니는 ‘붉은 하늘’로 회상한다.

“그 때 제주하늘이 벌겅해서. 진짜 하늘이 다 벌겅해서...우리 아버지가 그때 가보낭 아이는 죽은 엄마 젖 먹고있고, 안쪽에는 고개만 바깥에 내밀고 죽어이서. 내 먹엉 죽은거라 내 먹엉”
(그 때 제주하늘이 붉었다. 진짜 하늘이 다 붉었다. 우리아버지가 마을에 가보니 아이는 죽은 엄마 젖 먹고있고 안 쪽에는 고개만 밖에 내밀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숨어있다가 연기 먹어 죽은거다) 

결국 1948년 11월 말 즈음 동광리 사람들은 ‘폭탄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도너리오름 ‘큰넓궤’로 향한다. <지슬> 속 그 동굴이다. 연기로 군인들을 내좇을 때 홍 할머니와 신원숙(80) 할아버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홍 할머니가 말한다. “(연기에 쓴 고추가루를) 일부러 준비한 게 아니라. 가을때니깐 고추들을 많이 써 놓은 모양이라. 경행 고춧가루도 하영해서. 그 좁은 디 불 피우면 군인들이 밖으로 나온거라 먹으려고 가을에 해 놔뒀던건디, 군인들 오난 해보자 행 한거지. 죽느냐 사느냐 한 거지...”
(가을이니까 고추들이 많이 있던 것 같다. 그래서 고춧가루도 많았다. 그 좁은 데서 불을 피우면 군인들이 밖으로 나온거다. 사실 가을에 먹으려고 고춧가루로 만들어뒀던 것인데. 군인들이 오니까 한 번 해보자 해서 한거다. 죽느냐 사느냐로)

홍 할머니와 신 할아버지에게 큰넓궤로 동행해 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학자들이나 4.3 취재진들과 함께 큰넓궤에 안내자로서 수 차례 함께 한 바 있는 신 할아버지는 금세 수긍했다. 홍 할머니는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결국 함께 차에 올라탔다.

큰넓궤로 향하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차 안에서 홍 할머니는 계속 창 밖을 응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홍 할머니의 긴장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을에서 2~3km 정도 떨어진 큰 넓궤 앞에 다다르니 이젠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신 할아버지는 원래 억새가 우거져 좀처럼 찾기 어려워졌던 곳에 ‘이런 게’ 생긴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고 말한다.

 

▲ 큰넓궤에는 이제는 안내표지판도 있고 당시 증언과 생활상을 기록한 설명들도 발견할 수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겉에서만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안으로 향하기로 했다. 처음엔 취재진만 들어가려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동행한 마을 사람들도 “이왕 왔는데”하면서 하나 둘 씩 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메라 기자까지 총 4명의 취재진과 마을주민 이동일(68)씨와 동광리장 강경주(44)씨는 물론 일흔을 훌쩍 넘긴 홍 할머니와 신 할아버지도 굴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리걸음으로 쭈그려 지나가기도 힘이 들었다. 무릎을 땅에 대고 엉금엉금 기어가야 했다. 한 5미터 정도 기어들어가니 그래도 조금 허리를 펴고 앉을만한 공간이 나왔다.

여기서 높이 2m의 낭떠러지를 지나면 100여 사람이 지낼 수 있을만한 공간이 나오지만, 사다리도 없이 갑작스레 나온 탓에 더 들어가지는 못했다. 홍 할머니를 중심으로 덩치 있는 남자 대 여섯이 쭈그려 앉았다.

“삼춘, 정말 <지슬>영화에서처럼 여기서 정말 지슬(감자) 드셨어요?”
“게 먹었주게! 겨울에 땅에 묻어논 거” (그럼 먹었지! 겨울에 땅에 묻어놓은 거)

신 할아버지도 옆에서 덧붙였다.

“놈의 집에 가그네 죽어분 사람들 윗더리 돌아왕 땅에 묻어 놓은 거 먹어서. 거기서 그런거라도 봉가왕 먹어야지 어떵 할 수 없으니 살젠하믄 할 수 없주”
 (마을로 내려가, 남의 집에 가서 죽은 사람들 위로 돌아가 땅에 묻었던 걸 먹었지. 그런거라도 가져와서 먹어야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살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1948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즈음 이 곳에 처음 들어온 홍 할머니와 신 할아버지가 이 곳에서 지낸 날은 약 40일 정도. 들어온 지 몇 분만 지나도 갑갑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홍 할머니께 물었다.

“삼춘, 답답하진 않으셨어요?”
 “아이구, 왜 답답 안합니까. 하늘보고 싶어서 정말... 난 하늘보고 싶어그네. 하늘이 어떵사 생겨신지 한번만 봐줨시면 좋아실건디” (...난 하늘보고 싶어서,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만 봤을면 좋았을텐데)

백발노인이 되어 비로소 이 곳에 다시 오다

 

▲ 홍 할머니는 큰넓궤 안에서 당시의 생활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고통스런 기억일텐데도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65년만에 처음이라구요?”

동굴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홍 할머니는 오히려 편한 표정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1948년 겨울, 가족들과 이 곳으로 피신했던 11살의 꼬마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 돼서야, 65년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어... 바라보기도 싫어서 고사리 꺾으랜 와도 이 쪽으로 올 생각도 안해나서(웃음)”
 (그럼, 쳐다보기도 싫어서 고사리 꺾으러 와도 이 쪽으로는 올 생각도 안했어)
 
다소 엉겁결에 들어오게 되 버렸다.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홍 할머니가 웃으며 답한다.
“아이구 난 양 그 때 산낭 여기가 영 작은 덴 줄 몰라서...”(아이구 난 그 때 여기가 이렇게 좁은 곳인줄 몰랐어)

홍 할머니는 영화 <지슬>에서는 동굴 사이 어른들 사이에 낀 작은 꼬마였을 것이다. 그녀가 회고했다. “명이 기니까 여기 왔지 명이 짧아시믄 오지도 못해서”

홍 할머니는 최근 일은 기억하기 힘든데 이상하게 65년전 그 당시 일은 머릿속에 깊게 남아있다고 말한다.

“나 열 한 살 땐디. 다 알아져. 다 알아져. 나 해난 건 알아져 놈 해난 건 몰라도. 이제사 다 잊어부는디 4.3사건은 못 잊어븐다. 11살이라고 해도 다 알아져”
 (나 열한 살 때인데 다 알 수 있다. 내가 겪은 일은 다 기억난다, 다른 사람이 한 건 몰라도. 요즘 일도 다 잊어버리는데 이상하게 4.3사건은 못 잊겠더라. 11살때라고 해도 다 기억난다)

홍 할머니는 이 굴 속에서의 한 달여간의 기간을 회상했다. 마을 사람들이 조를 나눠 무장대와 토벌대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보초도 서고, 종종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가기도 했지만 어린 소녀였던 홍 할머니는 꼼짝없이 굴 안에만 있어야 했다.

“낮에는 잠만 자고 고만히 숨엉망있당 기침도 않앙 살고, 밤엔 말도 좀 크게 곧고...웃음도 하고”
 (낮에는 잠만 자고 가만히 숨어있다가 기침도 안하며 살고, 밤엔 말도 좀 크게 하고 웃기도 하고)

안에서 40일 동안 식수를 구하는 일도 문제였다. 가끔 청년들이 몰래 마을에서 음식을 구해다 오긴 했지만, 물허벅을 지고 이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에 가면 안에 물 떨어졌어요. 물을 뚝뚝 떨어지면 우리는예 이딧 물 받앙 먹어서. 이딛물 빨아먹고 억세 동글락 한 걸로 족은 대는 물을 빨아서 먹고. 바닥나고 와락 사람 받아살아서”
 (...물이 떨어지면 우리는 여기(질그릇)에 물 받아 먹었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빨아먹고 억새의 동그란 대로 물을 빨아서 먹으면서 살았지)

▲ 홍춘호 할머니가 큰넓궤 밖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삼춘, 동굴에서 나온 다음 연좌제 피해는 없었나요?”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이며 답했다. “연좌제 피해들 많이 있었지! 우리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게 출세해도 가지 못해여. 공무원 시험을 못 봐 아예 그런 디 못가. 우리 끌령들어가 예전같으믄. 말만 해도. 말도 못해. 이제 많이 좋아졌지”
 (우리 자식들이 출세하게 되도 그 자리에 가지 못해. 공무원 시험을 못봐. 아예 그런 자리에 못 가. 예전같으면 우린 감옥에 끌려들어가. 말만 좀 해도. 말도 못했지. 이젠 많이 좋아졌지)

신 할아버지가 덧붙였다. “밑에 가도 이런 말 절대 못해여. 이런 말 하면 맞앙 죽고, 왕따 당하멍 살아서. 때려도 한 대 맞서 때리지 못해여. 빨갱이하믄. 끽 소리도 못해서”
 (밑에 마을에 가도 이런 말 절대 못해. 이런 말 하면 맞아 죽고 왕따 당하며 살았어. 때려도 맞서서 때리지 못했어. ‘빨갱이’하면 끽 소리도 못했어)

홍 할머니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많이 좋아졌지. 청년들이 왕 이렇게 활동해주니...세상은 더 좋아져야지게”

동굴 밖으로 나간 뒤 홍 할머니는 가만히 근처 억새밭을 바라봤다. 우문인 줄은 알았지만 물었다. “삼춘, 그 동안 여기 올 생각 한 번도 안 하셨어요?”

홍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여길 왜 오나. 그 생각하믄 끔찍하지. 여기 볼 생각도 안해나서”

그녀가 사는 마을과 이 곳은 차로 3분 거리. 하지만 이 세상 어느 별천지보다 먼 곳이었다. 그 벽을 너무 갑작스레 무너뜨린 것 아닌가 걱정이 됐다. 삼춘을 마을 어귀까지 바래다 드렸다. 홍 할머니는 후련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신원숙 할아버지(왼쪽)과 홍춘호 할머니가 큰넓궤 안에서 1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던 그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홍 할머니의 뒷이야기

홍 할머니는 4.3에서 3명의 남동생을 모두 잃었다.

당시 병이 나거나 아파도 병원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조차 챙기지 못하는 상황 탓에 어린 동생들을 차례차례 대로 숨을 거둔다. 신 할아버지는 이것이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말했다. 2월 서귀포 화순에 내려가기까지 큰넓궤와 미오름 등지로 토벌대를 피해다니던 중 둘째와 막내 동생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큰 동생만이 살아남았지만, 화순으로 내려가 소학교를 다니던 중 또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5~6개월 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여름에 풀려났고, 결국 가족 중 아버지, 어머니, 사촌언니 세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동광리를 다시 찾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홍 할머니는 공교롭게도 1958년, 21살 때 동광리에 시집을 오게 된다.

그 이후 그녀는 동광리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마을에서 밭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