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중독자 광기, 주민들 수장에 겁탈까지

2013-04-01     김정호 기자

▲ 영화 '지슬' 속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 마을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손에 총을 쥐지 않고 걷고 있는 인물은 김 상사. 실존인물인 마약중독자 탁성록 제9연대 정보참모를 배경으로 했다. <영화 '지슬' 스틸컷>

[지슬로 본 제주4.3] ③ 영화 속 김 상사 실존인물 탁성록 '무차별 살해'

1948년 11월15일 새벽.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자리 잡은 무등이왓 마을.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마을을 깨우기 시작했다.

총을 든 군 토벌대들은 이미 마을을 포위한 상태였다. 제주 해안선에서 5㎞이상 떨어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해안으로 밀어내는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바로 이틀 전 상황이다.

마을을 장악한 군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겠으니 모두 대나무 밭으로 모이라고 요구했다. 따르는 이들이 없자 군인들은 강제로 주민들을 끌고 밭으로 향했다.

젊은이들은 이미 마을을 떠나 50~60대 중장년층만 연설에 참여했다. 강신학(당시 60세)씨 등 주민 10명이 대나무밭에 모이자 느닷없이 군인들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이중 1명은 구타 도중 밭 아래로 몸을 던져 목숨을 구했다.

곧이어 군인들 입에서 ‘빨갱이’ ‘폭도’라는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군화발과 장총은 쉬지 않고 주민들을 향했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쏟아져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 동광리 한 주민이 4.3당시 주민들이 집단 학살된 무등이왓에서 대나무밭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현재 이곳은 4.3당시 주민들이 모두 떠나 마을이 사라졌다. 일명 '잃어버린 마을'이다.ⓒ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피를 토하던 강군봉(당시 52세)씨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아들이 경찰이다. 왜 이러느냐”며 항의했다. “뭐라고? 경찰! 이 자식은 더 나쁜놈이구만” 군인들 폭행이 더 거세졌다.

당시 군인들은 제주출신 경찰에 대한 불신이 컸다. 좁은 지역 사회의 특성상 경찰로 연결되는 이른바 ‘괸당’(친척의 제주방언) 때문에 각종 정보가 무장대로 흘러간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인 아들을 외치던 강씨는 현장에서 숨이 꺼졌다. 팔다리가 부러져 밭을 기어다니는 다른 이들을 행해서는 총알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9명이 현장에서 처참히 죽었다. 사흘후에는 아들이 경찰이라고 외치던 강씨의 아버지마저 군인들 손에 죽었다.

그 시점 15살이던 무등이왓 주민인 신원숙(80)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나쁜 놈들이야. 잠자던 사람들을 불러내 개 패듯 때렸어. 죽기 진적까지 때리고 또 총을 쏴댔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6일 뒤 군인들은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민들은 집에서 기르던 돼지들과 함께 타죽었다. 집단 학살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 1948년 4.3의 악몽이 동광리 마을을 뒤덮히던 때 15살이던 무등이왓 주민 신원숙(80)씨. 신씨는 당시 학살을 눈으로 목격하고 토벌대를 피해 큰넓궤 동굴에 숨은 장본인이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인근 오름 등으로 피신한 마을주민들은 그해 12월10일 숨진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향했다. 이를 눈치 챈 군인들은 마을에 잠복해 유족 19명을 붙잡아 산채로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원숙씨는 “군인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멍석에 말아 곡식 더미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불을 붙여 산채로 태웠다. 그 옆에서 7살 난 아이들이 (부모를)살려달라며 소리쳤다. 차라리 그냥 총으로 쏴죽이지...” 

이른바 ‘잠복학살사건’이다. 주민들이 죽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숨어들어가면서 불에 탄 시신들은 수습하지 못했다. 그 시신을 돼지들이 먹고 돼지들은 다시 군인들이 잡아 먹었다. 그렇게 조용한 동광리 3개(무등이왓, 삼밭구석,조수궤)마을에서 160여명이 빨갱이와 폭도로 내몰려 잔인한 죽음을 맞았다.

영화 <지슬>을 보면 4.3당시 군 토벌대의 잔인함이 압축돼 있다. 시종일관 칼을 갈며 주민들을 난도질하는 중사. 그리고 마을 여성 ‘순덕이’를 사로잡아 칼로 위협하며 겁탈하는 마약쟁이 김 상사가 그런 인물이다.

이들은 영화를 위해 감독이 창작해 낸 캐릭터가 아니다. 실제 이런 인물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마약쟁이 김 상사는 제9연대 정보참모인 탁성록 대위를 영화에 그대로 대입한 인물이다.

▲ 제주비행장 미군수송기 앞에서 기념촬영한 장교들. 뒷줄 오른쪽부터 9연대 한영주 작전참모, 미 군조종사, 김정무 군수참모, 탁성록 정보참모, 앞줄은 미고문관과 안광수 경비대 작전과장. 왼쪽 끝이 마약중독자로 1948년 6월 제주에 파견된 제9연대 정보참모다. 영화 '지슬'속 김 상사가 바로 탁성록을 배경으로 한 캐릭터다 (1948. 11)<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탁성록은 1948년 6월 9연대와 함께 제주에 내려온 뒤 12월 육지로 떠날 때까지 집단학살극을 주도했다. 생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부터 성폭행까지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그가 마약 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취재를 통해 밝혀낸 김종민 정부 과거사정리위원회 전문위원은 “탁성록은 서북청년단이 아니라 진주 출신의 9연대 소속 마약중독자였다. 투약 상태서 집단학살을 주도했고 가장 피해를 본 사람들은 제주읍내 주민들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도립 제주의원(현 제주의료원)의 의사 생활을 하다 부산으로 피신했던 장시영(91. 삼남석유 대표이사 회장)씨는 탁성록이 마약을 투약한 사실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장 회장은 “오창흔씨(당시 후생의원 원장)와 함께 제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병원을 운영했다. 그때 탁성록이 오창흔을 자주 찾아와 아편주사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제주의원에서 경리주임을 맡았던 하모(89)씨 역시 4.3진상조사과정에서 “병원을 찾은 탁성록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며 모르핀(아편)주사를 달라고 했다. 이미 팔에는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많은 투약 자국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 1948년 11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 주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웠다. 마을이 불바다로 변하고 16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시신을 찾지 못해 가문마다 '헛묘'를 세워 조상들의 넋을 기렸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영화 속에서 김 상사는 모르핀을 투약하고 약에 취해 마당을 등으로 기어다닌다. 그리곤 학살을 하러 나서는 부하들을 향해 “계집애도 하나 잡아오라”고 말한다. 영화 속 순덕이를 겁탈하는 이도 바로 김 상사다.

실제 탁성록이 여성을 농락하고 살해까지 한 사실은 유족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3진상보고서에 따르면 강소희(증언 당시 73세)씨는 “탁성록이 내 친구 강상유를 범하고 강제로 동거까지 하다 결국엔 죽였다”고 증언했다.

영화 속 김 상사는 결국 가마솥에 갇혀 동생 ‘정길이’에게 죽임을 당한다. 등장인물의 모델이 된 탁성록은 반년간 제주에 머물며 수많은 주민들을 살해하고 1948년 12월 유유히 제주를 떠난다.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4.3 당시 제주의 실질적 무장대를 300여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정부는 제주 주민들을 무장 폭도로 간주하고 3만여명을 죽였다. 이중 1500여명은 10세미만의 어린 아이들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눈앞에서 부모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본 동광리 마을주민 김복남(74)씨는 “군인과 경찰이 죽창으로 ‘얏’ 고함을 지르면서 부모를 찔렀다. 창끝에 묻은 피를 생각하니 이곳(살해 장소)에 오기가 싫다. 상처가 아물다 싶으면 다시 돋는다...”고 말했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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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 속 장면. 동굴로 숨은 사이 토벌대들이 어머니를 칼로 죽이고 불까지 태우자 오열하는 무동이 삼촌의 모습.  <영화 '지슬'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