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라쇼몬…'진실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르다'

사회학자 권귀숙 '기억에 대한 진실의 상대성' 강조 冊'기억의 정치' 통해 "보통사람 개개인의 4.3에 대한 접근 시도"

2006-08-21     양김진웅 기자

지배 담론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의 4·3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여성 사회학자 권귀숙 탐라문화연구소 연구원(美 미시간대학교 사회학 박사)이 4.3을 해석하는 장치는 '기억'이다.

▲ 권귀숙씨가 펴낸 '기억의 정치'(문학과 지성사. 1만5천원)
기억은 지배계층의 시각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이 경시되는 경향을 보이는 '역사'와 이에 대한 대안의 하나로 제시된 백성, 민중, 서민들의 입을 통한 '구술사' 외에 과거를 재구성하고 복원하는 방법으로 동원된다. '구술사'가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역사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최근 펴낸 '기억의 정치'(문학과 지성사)에서 '기억 이론'에 바탕을 두고 제주 4.3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권씨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만 여겨지는 기억이 정치적·문화적 산물임을 하나 하나 밝혀 나갔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는 기억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유하면서 한 사회의 전통이 된다는 '기억 이론'에 주목했다.

역사와 구술사와 달리 기억에 관한 연구는 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양한 사회 관계망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가 재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대량학살의 사회적 기억과 더불어 이러한 '기억의 정치학'에 관한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의미가 자못 크다. 기억을 하나의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대량학살의 한 사례로 저자는 제주4·3사건을 선택했다.

4.3의 라쇼몬?...'진실의 상대성...개인의 기억은 다양하다'

'라쇼몬'...단편소설과 영화에서 유래

영화 라쇼몬(羅生門)은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도둑의 이야기와 함께 끝내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는 부조리를 보여주는 일본영화. 1922년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이 모태다.

목격자의 기억이 달라 진실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논리를 차용해 '진실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개일 수 있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저자는 체험자들의 사회적 기억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4.3을 바라보며, 어떤 기억을 강조하고 있는지 살피고, 이제까지 밝혀진 진상과 공식기록 또는 지배 담론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의 4.3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또 저자는 목격자의 기억에 따라 진실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영화 '라쇼몬'을 차용해 4.3당시의 체험자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4.3의 기억이 달라질 수 있다는 '4.3의 라쇼몬'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실제 그 동안의 구술, 증언, 문헌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경찰·군인·서북청년단·(좌익)무장대·주민 등의 기억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 경찰 → '학살,,,군인과 서북청년단에 더 책임 있어'

경찰의 사회적 기억은 '영웅적 기억' 보다는 민간인 학살을 부인하는 '합리화된 기억'이 우선적으로 작용하면서도,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군인이나 서북청년단에 돌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또 공권력을 가진 경찰도 당시 지휘 체계상 군인 아래였고 실제 학살도 군인이나 서청이 감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건 전과 초기에 경찰이 경비대 보다 힘이 강했던 시기의 기억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등 경찰 증언자의 기억은 경찰의 공식기록이나 희생자 가족의 기억과 다르게 형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 4.3 당시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 군인 → '경찰이 사건의 원인이자...주민학살 책임자'

경찰의 기억과 달리 고위급 군인들은, 반대로 경찰이 사건의 원인이며 주민학살의 책임자라고 증언한다. 당시 제9연대장 김익렬 장군 역시 유고를 통해 '김달삼과의 평화회담 등 자신의 행동은 다소 영웅적 기억으로 남기고, 4.3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경찰에 넘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일반군인들은 '제주 출신 군인'과 '육지 출신 군인'을 구분하고, 제주출신 군인도 피해자였던 시기를 강조한다. 그리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은 '핵심장교' 중 '일본군 지원병 출신'과 다른 부대의 참모원에게 학살의 책임을 넘기고 있다.

결국 군인 증언자의 기억은 제주주민이나 경찰의 기억과 국방부의 공식기록과 다르게 저장돼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 서북청년단 → '군인과 경찰에 책임...정치적 싸움에 이용당했다' 

주민들의 기억속에서 서북청년단은 잔인한 '사람 백정'이지만 서북청년단은 군인과 경찰에게 진압의 책임이 있고 자신들은 제주 지역의 정치적 싸움에 이용당했다고 기억한다.

심지어 이들은 다른 서청 단원이 학살한 부분에 대한 기억마저 억압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이는 서청 출신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방어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산사람(무장대) → '우리도 피해자...공포에 떨었다'

주민들에게 '산사람'으로, 경찰과 군인에게는 '폭도'로 불렸던 무장대는 "거의 사망했거나 생존했어도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증언자들도 고위급이 아닌 주변적인 인물들"이라며 먼저 기억 계층의 한계를 언급했다.

저자는 이어 피난 입산 후 자의적이든 강제적이든 무장대에 협조해 활동한 적이 있고, 그 활동으로 체포되거나 형무소생활을 한 피난 입산자를 '산사람'에 포함했으며 무장대 출신과는 구별했다고 밝혔다.

이들 산사람은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전쟁상황을 겪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이용당했거나 무서웠고, 비참했고, 스스로 공포에 떨었다고 기억한다.

저자는 "산사람의 기억은 폭도나 공비로 규정한 기존의 역사와는 매우 다를 뿐더러 '폭도'에 의한 피해자들의 증언처럼 잔인무도한 학살의 기억은 드러내지 않는다"며 "산사람 출신의 기억은 사건 이후 강도 높았던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이 남용되는 분위기 속에서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 국가기록원 소장.

▲ 좌익단체 → '4.3은 민중혁명...숙청과 학살에 대한 기억은 억제돼'

좌익단체의 경우 남로당 및 그 산하단체에 가입했던 단원으로 무장투쟁에 가담하지 않은 생존자를 대상으로 했으며 무심코 도장을 찍었거나 강제로 남로당에 가입된 주민은 제외했다. 좌익단체의 주도자들은 반미운동으로서의 '민중혁명'으로 일관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4.3봉기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의 공개는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분위기와 민중항쟁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며 "피해주민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입산 남로당원에 의한 반동분자 숙청이나 무차별 방화 또는 학살부분에 대한 기억은 억제되고 있다"고 봤다.

이어 "4.3을 민중혁명으로 생각하는 좌익의 기억은 일본에서 1963년에 출간된 4.3역사인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김민주 저)와 일치하고 있다"며 "좌익단체 출신의 기억속의 4.3은 '산사람'의 기억이나 좌익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 우익단체  → '4.3은 공산당폭동...현재 우익의 논리 유지.전파 노력'

우익단체 출신의 기억은 4.3을 '공산당 폭동'으로 보는 정부의 공식 역사와 부합한다. 대부분의 생존자가 비난하는 서청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기억을 보여준다.

"이들의 기억은 갈등없이 40년간 유지되어 왔고 그 기억을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다"는 저자는 "대동청년단이 주민을 괴롭혔던 사건이나 무조건 그냥 패는 제주학도호국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고 기억의 한계를 꼬집었다. 또 현재의 우익단체들은 '공산당폭동과 과잉 진합론'을 주장하며 우익단체 출신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전파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 일반 주민들 → '복잡, 모순적, 다층적'...밀고자도 '학살자'로 기억

저자는 4.3피해자의 기억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다층적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주민의 경우 피해자와 피난민(중간치기), 여성, 민보단원에 대해 다소 각각 다른 기억으로 설명한 저자는 "대부분 주민들은 이들 모두를 가해자로 기억하는 동시에, 특히 함께 살던 이웃의 밀고자도 학살자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또 제주주민들이 기억하는 가해자는 '무장대 피해자'와 '토벌대 피해자'로 이분된 제주도의회 조사보고서 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띤다고 강조했다.

먼저 피해자들은 가해자였던 증언자가 가해과정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고 있는데 반해 피해자 가족이나 이웃은 특정 가해자와 그들의 학살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 1949년 4월 당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폭도'와 '토벌대'가 동시 가해자...'밀고자'와 '토벌대' 동시 학살자

또 이미 알려진 '산사람' '폭도' '토벌대' 외에도 이웃마을 사람, 밀고자, 민보단 등도 가해자로 포함돼 있다는 복잡성을 지닌다. 즉 상당수의 생존자는 '폭도'와 '토벌대'가 동시에 가해자였으며, 이웃인 밀고자와 토벌대을 동시에 학살자로 기억하고 있다.

저자는 "피해자들은 역사가나 담론 주도자가 말하는 '진짜 가해자'가 아닌 자신의 직.간접 체험속의 사람을 가해자로 믿고 있다"며 "토벌대가 가족 및 이웃을 괴롭히거나 학살했다고 기억하는 이가 가장 많았으나, 부모와 형제를 죽인 이들이 각각 다르고 이후의 경험도 다중적"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공산당 폭동과 과잉진압론에 따르면 초기에는 폭도가 후기에는 진압자인 토벌대가 주 학살자일 수 있지만 주민의 기억엔 폭도와 토벌대가 동시에 가해자로 인식된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피난민(중간치기)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어느 편에도 설 수 없거나 상황에 따라 선택해 살아남으려고 했던 '무서운 세상'의 공포가 남아 있다"며 "한국전쟁때 제주남성들이 군인으로 다투어 자원입대를 했을 정도로 특이한 삶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 여성 → '특수한 폭력에 대한 피해 공개 보다 침묵하는 경향'

여성은 "대량학살의 과정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폭력이 반드시 있지만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성폭행이나 강제결혼 경험을 증언한 경우는 아직 없다"며 "이는 제주문화권에서 자신과 사회에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억을 억압하고 있다"고 저자는 봤다. "여성이 말할 수 있는 기억은 가족중심의 삶과 사건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던 일상생활과 연관된 것들"이라며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기보다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로 설명했다.

▲ 군의 선무귀순 작전에 의해 하산한 주민들.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 많이 보인다

▲ 민보단원 → 스스로 '피해자'와 '가해자' 동시 기억...'최종학살자는 다른 집단'

토벌대에게도 적일 수 있는 모순적 상황에 놓인 민보단원은 '총알받이'의 피해자와 '창으로 찌른' 가해자의 기억을 동시에 갖고 있지만 최소한의 토벌참여와 명령에 의한 참여일 뿐 최종 학살자는 다른 집단이라고 믿고 있다.

4.3에 대한 다양한 대중담론(공산당폭동론, 민중항쟁론, 양민학살론) 역시 보통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담론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고, 모두 피해자로서의 사회적 기억만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 지배담론에서 나와 일반사람들의 목소리 들어야...상생에 관한 기억 조사할 것"

특히 모순적으로 얽힌 산사람의 기억을 들며 "공산당 폭동론에 의하면 잔인한 폭도이고 민중항쟁론에 의하면 외부세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일 수 있다"며 "심층기억과 통용기억이 서로 모순적으로 저장돼 있다"고 해석했다.

권 연구원은 이와관련 "개인으로 보면 '라쇼몬'은 개인의 기억에 국한된다"며 "역사가 등 담론 주도자가 아니라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을 중심으로 구술되는 일반사람들의 기억들"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국가가 정해주거나 역사가 담론을 제시해 주고 있었지만, 앞으로 다양한 일반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앞으로의 4.3은 문형순 모슬포 경찰서장 처럼 묻혀져 버린 남을 도와줬던 기억들을 많이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연구원은 "4.3 당시 남원읍 신례리 경우처럼 마을을 도와줬던 사례도 넣고 싶었지만 시간상 여의치 않았다"며 "앞으로 상생에 관한 기억을 조사하고 싶다"고 앞으로의 연구에 대한 일련의 방향을 밝혔다.

제1장~7장까지...'억압된 기억이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어질까'

제1장은 대량학살과 기억에 관한 개괄적 소개이다. 대량학살의 정의와 그동안 소개되어왔던 기억 이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2장은 현재 체험자들이 오늘날 기억하고 있는 4·3을 다루면서 토벌대, 군인, 서북청년단, 민간인 등 과거의 위치나 신분에 따라 4·3이 다르게 해석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 또한 2장의 내용에 국한됐다.
제3장은 학살의 심리적·문화적 조건과 과정을 다루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왜 발생하는지를 미시적인 접근 방법으로 분석함으로써 4·3 과정에서 어떻게 적을 설정했고 그들을 학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4~5장은 4·3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후체험 세대)를 중심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이미 4·3의 체험자보다 후체험 세대가 더 많이 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4·3의 기억을 전수받고 있는지 경로와 내용의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제4장). 그리고 50여 년 전 역사적 사건을 어떤 인식 회로에 의하여 4·3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도 분석했다(제5장).
제6~7장은 4·3 다큐멘터리에 드러난 기억들이 공식 역사에 대항하는 현장을 분석한다. 재현 이미지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과정과(제6장) 대량학살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이미지, 스토리 구성을 정치사회적 맥락과 관련지어 살펴보면서(제7장) 기억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진실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