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도 사망신고도 없는 희생...70년간 봉인된 기구한 인생
[진단-대법원 규칙 개정] 뒤틀린 가족관계 바로 잡을 기회 제주4·3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대상 사례 접수 대법원 규칙 개정으로 구제 범위 확대
제주시 노형동 함박이굴 출신인 박삼문씨는 1953년생이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12살이나 많은 1941년생이다. 올해로 82세. 진짜 이름은 이삼문이다.
2018년 3월31일 제주4·3 증언 본풀이를 통해 소개된 이 할아버지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다. 모진 역경을 이겨낸 그의 이야기에 현장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이 할아버지는 4·3 당시 부모와 두 형, 누나, 할머니까지 6명의 가족을 동시에 잃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하루 아침에 호적이 없는 고아 신세가 됐다.
전남 목포의 고아원으로 옮겨지고 얼마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을 피해 이곳저곳을 숨어지내다 지금의 박호배씨를 만났다. 박씨는 이 할아버지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이 할아버지는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국가공권력으로 80년 삶이 송두리째 무너졌지만 이를 바로 잡을 길은 묘연했다.
10일 제주도에 따르면 6월부터 진행된 가족관계 정정 신청 및 조사를 통해 244명의 4·3희생자 및 유족에게서 이처럼 뒤틀린 가족관계가 확인됐다.
이중 약 70%는 실제 부모가 사망해 친인척의 자식으로 등재돼 경우다. 공부상 삼촌의 자식으로 등재되면 ‘조카’, 할아버지면 ‘형제’가 된다. 이 할아버지처럼 성이 바뀌는 일도 허다하다.
이처럼 뒤엉킨 가족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자녀가 호적상 아버지를 상대로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을 거쳐 법원에 법률적 자식임을 인정받는 인지청구의 소를 재차 청구해야 한다.
인지청구는 자녀가 부모를 상대로 법률적 자식임을 인정받는 절차다. 민법 제863조(인지청구의 소)에는 ‘자녀가 부 또는 모를 상대로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호적상 아버지를 상대로 한 친생자관계 부존재와 실제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인지청구는 모두 자식 몫이다. 유전자 검사로 입증이 가능하지만 시신이 없다면 청구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존에는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대상에 유족도 빠졌다. 각종 증빙 자료를 확보해도 희생자가 아닌 유족은 가족관계 정정 대상 자체가 아니었다.
올해 6월30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한 가족관계 등록사무처리규칙’(이하 4·3규칙)이 개정되면서 유족도 정정 대상에 포함됐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중앙위)가 정한 유족도 포함되면서 가족관계 정정 대상과 신청자의 범위가 한층 넓어졌다.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길이 열렸다.
4·3사건 전후에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도 못하고 사망한 희생자도 구제될 것으로 보인다. 생후 1~2년 만에 4·3사건으로 숨진 아이들은 대부분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사망신고 기록도 없다.
이 경우 부모가 희생되더라도 형제자매가 가족관계 정정 신청을 할 경우, 인우보증(隣友保證)을 통해 4·3중앙위원회에서 유족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인우보증은 다른 사람의 법률적 행위에 대해 보증을 서는 방식이다. 실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공부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우보증으로 형제자매들이 유족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행정안전부의 4.3용역에 참여한 한 유족은 ”유족 신청을 하려면 600만원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을 해야 한다. 그마저 승소 확률이 1%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가족을 입증하려면 무덤을 파서 DNA를 확인해야 하는데 행방불명인은 어떻게 하냐”며 “호적이 정리돼야 억울함을 풀 수 있다. 이 문제를 풀어야 4·3해결이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