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서린 제주4.3의 恨 “드디어 무죄 선고 받았수다”
[제주4.3유족회-재향경우회 합동 순례]② 불법 군법회의 받아 끌려간 목포, 잊힌 그 날의 기억
“내 할아버지가 4.3때 여기(목포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고 배에 태워져 목포와 제주 추자도 사이 깊은 바다에 수장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억울함이 한가득 이지만, 그나마 올해 직권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늦게나마 명예회복을 이뤄 감회가 남다릅디다.”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나지막하게 솟은 산(山)과 옆으로 세워진 아파트. 그곳에는 제주4.3 희생자들의 한(恨)이 서렸다.
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은 과거 도민들이 4.3으로 억울하게 끌려가 수형 생활을 한 ‘목포형무소’ 옛터다. 제주4.3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군법회의를 통해 내란죄와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선고 받고 수형생활을 한 바로 그곳이다.
목포형무소는 제주4.3 당시 600여 명이 수감된 곳으로 4.3 관련 수형인들이 가장 많이 수감된 곳으로 파악된다. 일반재판 수형인은 120여 명으로 추정되며,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불법 군법회의를 받고 수감된 이들만 5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15일 오전, 목포형무소 옛터를 찾아 4.3영령들을 기렸다. 이들 단체는 오는 16일까지 일정으로 ‘화해와 상생을 위한 합동순례’를 진행 중이다.
전남도 일대에서 4.3-경찰 관련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정으로 지난 15일에는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경찰 영웅 안병하 치안감을 기리는 안병하공원을 방문했다.
제주 4.3희생자 유족들과 전직 경찰관 모임인 재향경우회는 4.3사건을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수십 년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오다 지난 2013년 8월 화해의 손을 맞잡았다.
당시 두 단체는 이념적 갈등을 버리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한 뒤 매년 합동 참배 등 진정한 화해와 상생이라는 제주4.3의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이들이 찾은 목포형무소에는 일반재판을 받은 수형인들은 대부분과 군법회의 대상자 중 다수가 갇혔다. 중형에 처해진 군법회의 대상자들이 대구나 김천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지기 전 거친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도민이 수형 생활을 하다 숨지고 행방불명된 곳임에도 목포형무소 옛터임을 알리는 표식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산을 잠시 오르면 나타나는 ‘수형인 합장비’가 과거 형무소였음을 알려주긴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수형 사망인을 기리는 합장비였다.
이날 목포형무소를 찾은 강춘희(76) 제주4.3희생자유족회 여성부회장은 합장비 앞에서 묵념하고 4.3 당시 아픈 기억에 대해 증언했다.
강 부회장의 할아버지는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끌려가 군법회의에 회부, 죄를 선고받고 목포로 보내진 행방불명 된 수형희생자다. 목포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만 들고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어 갑갑한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 할아버지가 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강 부회장은 “할아버지가 목포로 끌려간 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큰 배에 태워져 끌려가 목포와 추자도 사이 깊은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됐는 줄도 몰라 제사는 기일이 아니라 생신날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다른 지역의 사상범 재소자들과 함께 목포형무소에 남은 재소자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임이 분명하다고 밝혀진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한 명도 없으며, 4.3관련 재소자들은 전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목포형무소 간수는 “군인들이 재소자들을 사살했는지 수장시켰는지는 목격하지 못했으나 육지에서 사살하지 않고 배로 싣고 나갔을 것”이라며 “군인들에게 실려 나간 이들은 다시 본 적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당시 군인에 의해 끌려간 4.3 수형인들은 목포시 인근 바다 등지에서 집단학살 당한 뒤 바다에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 부회장의 할아버지 역시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상태로 앞선 방식으로 희생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 부회장은 “할아버지도 그렇지만 내 아버지와 남동생도 4.3으로 죽었다. 아버지는 내가 3살 때인 1948년쯤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됐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남동생은 젖먹이 때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아버지, 남동생 모두가 4.3으로 희생당해 우리집 대가 끊겼다. 나까지 죽었으면 우리 집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뻔했다”며 “산에 숨어 살다 주정공장에 끌려간 뒤 겨우 살아남은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치매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3년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치매를 앓을 당시 ‘저기 불남져, 불남시난 얼른 도망가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며 “아마 4.3 당시 불에 타는 마을을 떠올리신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뤄 다행”이라고 말했다.
강 부회장의 할아버지는 올해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직권재심을 통해 겨우 명예회복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목포형무소를 찾으니 감회가 새롭다. 할아버지가 이곳에 억울하게 끌려온 뒤 죄인으로 살다 올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회복을 이루셨기 때문”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순례단은 목포형무소 옛터에서 4.3영령을 기린 뒤 조화를 올리고 전남 나주로 이동, 일제강점기 설치된 동양척식주식회사문서고와 옛 나주경찰서를 찾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설치한 국책회사로 전남 나주평야 일대 수탈을 위해 출장소를 세운 흔적이 문서고로 남아있다. 옛 나주경찰서는 일제강점기 세워진 건물로 독립을 염원한 민족운동가들이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 수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 곳이다.
비극적인 대한민국 현대사로 한국전쟁 이후 인명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제주4.3, 정당한 이유 없이 내 가족이 끌려가고 죽어갔다. 잔혹한 일본과도 다름없는 국가폭력이었다.
3만여 명에 달하는 도민들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죽임당하거나 고초를 겪고,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직권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을 이뤄내고 있지만, 70년 넘는 세월 가슴 깊이 담아둔 한(恨)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제주도의 해원,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목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 목포=김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