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에 서린 제주4.3 흔적, 무슨 죄로 끌려가야만 했나
[제주4.3유족회-재향경우회 합동 순례]③ 호남-광주-전주 형무소, 귀향하지 못한 그들
“평화로운 섬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2003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제주4.3사건 관련 말씀’ 중)
2003년 10월 31일, 국가원수가 제주4.3 당시 많은 사람을 무고하게 희생시킨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이라며 공식 사과했다.
한국전쟁을 제외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잔혹한 7년여(1948~1954년)의 제주4.3 기간, 도민들은 셀 수도 없이 내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었다.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중산간 마을에 있었다거나 건장한 청년이라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한라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3만여 명에 달하는 도민들은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죽임당하거나 고초를 겪고,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불명됐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는 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 일대 4.3-경찰 관련 ‘화해와 상생을 위한 합동순례’를 진행했다.
전남도 일대에서 4.3-경찰 관련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정으로 지난 15일에는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경찰 영웅 안병하 치안감을 기리는 안병하공원을 방문했다.
15일에는 형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불법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받은 도민들이 수감 생활을 한 목포형무소를 찾아 4.3영령들을 기리기도 했다.
제주 4.3희생자 유족들과 전직 경찰관 모임인 재향경우회는 4.3사건을 두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수십 년간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오다 지난 2013년 8월 화해의 손을 맞잡았다.
당시 두 단체는 이념적 갈등을 버리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약속한 뒤 매년 합동 참배 등 진정한 화해와 상생이라는 제주4.3의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이들이 찾은 호남지역은 4.3 당시 도민들이 목포와 광주, 전주 등 형무소로 보내진 아픈 기억이 서렸다. 더군다나 동포를 죽이러 제주로 내려가라는 명령에 그럴 수 없다며 항거한 제주4.3 쌍둥이 사건이라 불리는 여수 순천10.19가 발생하기도 한 곳이다.
목포형무소는 4.3 관련 수형인들이 가장 많이 수감된 곳으로 파악된다. 1947년부터 일반재판을 받아온 희생자들과 1948년, 1949년 두 차례의 불법 군법회의를 받은 도민 600여 명이 수감된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들은 1949년 9월 발생한 목포형무소 탈옥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대부분은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인으로 남게 됐다.
1949년 9월 14일 목포형무소에서는 제주4.3 관련 수감자들을 포함한 재소자 400여 명이 형무소 무기고를 습격,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00명 수용 정원인 형무소에 1400여 명을 수용하면서 재소자들이 집단탈옥을 시도한 것.
당국은 곧바로 군경을 비롯한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 탈옥수를 발견, 사살하거나 체포하면서 열흘간에 걸쳐 진압했다. 이때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던 도민들이 많이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탈옥사건에 연루, 희생된 도민 수는 정확한 집계 자료가 없어 확인하기 힘들지만, 제주 출신 탈옥 재소자는 52명에 달하고 증언에 의하면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살된 시신은 목포형무소 뒤 야산에 한꺼번에 묻히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당국은 형무소 별 불순분자 처리 방침을 세우고 상당수를 총살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목포형무소에 남은 4.3 관련 재소자들은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었다.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목포형무소의 경우 언제 어디서 몇 명을 총살했는지 불분명하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 한국전쟁 당시 목포형무소 간수의 진술로는 4.3 관련 재소자들이 목포시 인근 바다에서 집단학살, 수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형무소에서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수형인들이 머물렀다. 이들은 대부분 일반재판 수형인이었으며, 200명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수감 중 한국전쟁을 거치며 행방불명되는 등 희생자가 됐다.
일부 타 형무소로 이송된 경우나 광주형무소에서 옥사한 재소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역시 대부분 살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수감 상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23일 석방된 강위옥 씨는 “3년 이상 수형자들은 다 죽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전주형무소에서는 불법 군법회의를 거친 여성 수형인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미결수 상태의 남성 혐의자들도 일부 수감된 사실이 증언과 4.3위원회 신고서를 통해 확인된다.
전주형무소 근무자와 목격자 등의 증언에 따르면 4.3 관련 미결수 상태로 수감된 재소자들은 한국전쟁 직후 전주시 공동묘지 등지에서 전원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목포와 광주,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4.3 관련 재소자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감히 헤아려볼 수도 없는 억울함을 안고 재판장에 서 형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해야만 했던 제주도민들. 억울한 형기를 마치기도 전에 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학살돼 더 이상 고향 땅을 밟아 볼 수도, 그리운 가족 들을 만나볼 수도 없게 된 그들.
영문도 모른 채 아무런 이유 없이 잡혀가 재판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한 채 타지로 끌려간 이들의 설움은 유족들이 고스란히 안아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응축된 한으로 남는다.
국가원수의 공식 사과를 시작으로 배보상에 이르기까지 제주4.3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생존희생자들의 삶의 시간은 이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진정한 해원을 이룰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다니는 4.3 순례지만,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한이 전해지는 듯하다. 우리가 전국 각지의 4.3 관련 순례를 다니며 영령을 기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 광주=김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