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말만 꺼내면 아직도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해” 

[4.3 75주년] 가슴 깊이 맺힌 억울함에 ‘눈물’ 짓는 유족들

2023-04-03     김찬우 기자

“제주4.3 말만 꺼내면 아직도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해” 

 

“와보라는 부름에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잠시 나간 아버지는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그때 그 신발이 아직도 사무칩니다.”

사람 목숨이 그렇게도 쉬운 것이었나 싶었다. 이유도 없이 끌려가 당연하다는 듯 총살당했고, 시신조차 아무렇게나 처리됐다. 피의 광풍이 존엄한 생명을 앗아간 제주4.3이 어느덧 75주년을 맞았다.

질곡의 세월 딛고 선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유족들이 각명비에 적힌 가족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제를 올렸다.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에서 온 이화자(81) 어르신은 4.3 당시 부친을 포함해 같은 동네에 살던 친척 10여 명이 끌려가 죽임당하는 피해를 겪었다. ⓒ제주의소리

# 부르길래 갔더니 총살, 한 동네 살던 일가족 피해 커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에서 온 이화자(81) 어르신은 4.3 당시 부친을 포함해 같은 동네에 살던 친척 10여 명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피해를 겪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 목숨을 한낱 종잇장처럼 구겨버린 것이었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어르신은 끔찍한 기억이 생생하다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각명비에 적힌 아버지의 이름을 손으로 매만지며 위아래로 적힌 이(李) 씨가 모두 친척들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아버지의 형제들 모두 총부리를 피하지 못했다. 

일본에 살고 있던 이 어르신 가족은 4.3 당시 가족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입도했다가 돌아가는 뱃길이 막혀 끔찍한 4.3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가을날 집마당에서 조 타작을 하던 이 어르신의 아버지 이윤우(당시 31세)는 잠시 와보라는 누군가에 손짓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부친이 총살당할 당시를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방 오겠거니 한 부름에 맨발로 간 고인은 그대로 바닷가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심지어 죽은 척 한 것 아닌가 의심한 군경은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했다. 

집에서 300미터 가량 떨어진 가까운 바닷가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 아버지의 시신은 겨우 수습해 살아계셨던 할아버지 댁으로 모셔졌다. 당연히 정상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었기에 집터 아래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르신은 “아버지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잠시 나갔다가 그대로 돌아가셨다. 그때 그 신발이 아직도 사무친다”라면서 “친척들이 한 동네 사니까 피해가 컸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죽이니 억울함에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지어 보였다. 

각명비에 적힌 4.3 영령을 위로하고 있는 유가족들. ⓒ제주의소리
각명비에 적힌 4.3 영령을 위로하고 있는 유가족들. ⓒ제주의소리

# 노무현 전 대통령님 사과가 유족들 한 많이 풀어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이 아버지를 끌고 갔다. 경찰은 3일만 조사하고 돌려보내겠다 했지만, 역시나 돌려보내지 않았고 아버지는 끝내 한 구덩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제주시 화북동에 사는 고순희(79) 어르신은 4.3 당시 아버지를 잃었다. 양복점을 운영하며 경찰 제복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던 고인은 아는 경찰들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끌려가 총살당했다.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채 발견된 구덩이는 처참했다. 아이를 밴 임신부가 창에 찔린 채 숨져있었고, 그 아래로는 무수한 시체가 깔려있었다. 아버지 고우범(당시 36)도 마찬가지였다. 

고 어르신은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 경찰들은 맡겨뒀던 옷을 찾으러 아무렇지 않게 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끌려가 죽임당한 이유조차 모른 채 그냥 조용히 살아야만 했다. 당시 고 어르신의 나이는 네 살이었고, 위로는 언니, 아래로는 갓 태어난 동생이 있었다. 

어머니 혼자 가계를 책임지기 어려웠기에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생이던 고 어르신의 언니는 생활 전선에 바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언니는 가장의 역할을 했다. 

고 어르신은 “그때가 2월, 겨울이었으니 엄청 추울 때다. 그렇게 아버지는 끌려가 구덩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며 “너무 억울하다. 멀쩡히 잘 살던 사람이 죽어버린 것 아니냐. 그때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지 한두 달 밖에 안 됐을 때였다”고 목이 잠긴 채 말했다. 

75주년을 맞아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고 어르신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유족들의 한을 풀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것 아니냐. 대통령이 국가를 대신해 사과해준 때가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각명비에 적힌 4.3 영령을 위로하고 있는 유가족들.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