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문 어르신의 마르지 않는 눈물...“죽기 전 바람은 제주4.3 유족 오르길”
[4.3 75주년] 추념식 무대서 아들 사연 낭독 “지금도 눈물 나...할아버지 후손으로 살 수 있게”
제주 4.3으로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이삼문씨의 이야기
1941년 이삼문, 1953년 박삼문.
두 가지 이름으로 살아온 노인의 두툼한 눈가는 검붉은 색으로 짓물러있었다. 온 가족을 4.3으로 잃고 평생을 타향살이한 그의 눈가에는 얼마나 많은 한이 맺혀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러 내렸을까. 어느새 생의 끝자락에 선 그의 유일한 염원은 “4.3유족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3일 열린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는 아주 특별한 사연을 가진 가족이 참여했다. 바로 이삼문 어르신 가족이다.
옛 제주 노형리 함박이굴 출신인 어르신은 4.3으로 인해 부모(이배근·김신현)와 두 형(이화서·이화옥), 누나(이지자), 할머니(현영휴)까지 모두 잃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당시 나이 겨우 7세.
친족 집을 전전하다 운이 따라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김종군이라는 이름의 해군장교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해군 장교였다는 것만 기억할 뿐, 당시 이삼문 어르신도 나이가 너무 어려 해군장교의 계급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김종군 씨가 당시 제주도내 모 고아원 관계자에게 '이 아이(이삼문)를 목포로 데려다주면 찾으러 가겠다'는 말을 남겨 어르신은 전남 목포의 고아원으로 터를 옮기게 됐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버지처럼 자신을 아껴주던 김종군 해군장교와의 조우는 물거품이 됐다. 그러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해 고아원에서 뛰쳐나왔고, 음식을 찾아 목포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인민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는 굴에 숨어 지냈고, 무작정 골라 탄 배에서 제2의 가족이 된 박호배 씨와의 연이 닿았다.
그집 사랑방에서 지낸지 3년쯤 지나 13살쯤 됐을 때, 박호배 씨는 어르신을 자신의 양자로 호적에 올렸다. 다만 원래 아들 위로 호적을 올릴 수 없어 나이를 낮췄다.
1941년생 이삼문씨는 그렇게 1953년생 박삼문씨가 됐다.
그의 사연은 4.3 70주년을 앞둔 지난 2018년 3월 제주4.3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4.3증언본풀이를 통해 알려졌다. 이후 어르신은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았지만, 끝내 유족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4.3평화공원에 행방불명된 사망자로 처리된 각명비도 뒤늦게 지웠다.
이삼문 어르신처럼 ‘뒤틀린 가족관계’를 가진 4.3희생자와 유족은, 제주도가 파악하기로 244명이다.
이번 추념식 본 행사에서는 어르신의 사연을 정리한 영상과 함께, 그의 첫째 아들 박상일 씨가 단상에 서서 소감을 밝혔다.
박상일 씨는 “4.3으로 아버지 성이 바뀌면서 저도 이씨가 아닌 박씨로 살아왔다. 언젠가 저에게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 사실을 접한 날, 아버지가 불쌍해서 방구석에서 울기만 했다”면서 “다행히 올해 7월부터 희생자와의 친생자 확인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오늘도 저와 저희 아버지는 이배근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삼문 어르신과 두 아들은 곧이어 하늘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리며 추념식 참가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비록 홀로 살아남았지만 두 아들, 두 명의 손주까지 네 명의 생명이 어르신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추념식이 끝난뒤 <제주의소리>와 만난 이삼문 어르신은 본인과 가족 사연이 추념식을 통해 알려진 소감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별 할 말이 없다. 그저 눈물이 날 뿐”이라고 짧지만 서글픈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면서 “내가 나이도 많고 죽기 전에라도 이쪽(4.3유족)으로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추념식을 지켜본 도민과 국민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서 저처럼 뒤틀린 가족관계를 가진 분들이 정식으로 4.3유족으로 인정받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