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뒤틀린 호적 70여 년 만 복원...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4.3 순례 동행취재] (중) 4.3행불인유족협의회, 전주형무소 희생지·구 대전형무소서 영령 기려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해야했던 이들. 모진 고문 뒤 집단학살된 이들은 70여 년이 흐른 세월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어느덧 생애 끝자락에 다가서 있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10일 전주형무소사건 희생지와 구 대전형무소를 방문해 수형 피해자들을 기렸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의 전주형무소사건 희생지에는 우거진 풀 너머로 유해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4.3 당시 여성들은 전주형무소로 붙잡혀 왔고 대부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달리한 이들도 있지만 형 만기 후 출소한 이들도 있었다.
박화춘 어르신도 전주형무소에 수감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희생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모진 물고문을 받는 등 지독한 수감 생활을 견뎌야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제주로 돌아온 박 어르신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 4.3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에 일절 내뱉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박 어르신이 4.3의 이야기를 꺼낸 건 2016년 때 일이었다. 자녀들에게 통한의 세월 속 묵혀둔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 박 어르신은 지난해 12월 희생자 미신고 생존수형인 신분으로 직권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양성홍 행불인유족협의회장은 박 어르신의 먹먹한 사연을 전하며 “4.3의 완전한 해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며 “직권재심이 현재 진행 중인 희생자들과 유족은 꼭 재판장에 나와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기억들을 빠짐없이 증언해 후대에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힘줘 말했다.
이어 호남지역에서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오연순 어르신도 자신의 뒤틀린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 어르신의 아버지는 광주형무소로 끌려간 뒤 살아 돌아오지 못 했다.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해 아버지의 사촌형제 딸로 호적에 등록된 오 어르신은 양쪽 부모 중 누구도 살아계신 분이 없었기에 친부의 딸이라는 점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고 호적을 정리하는데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오연순 어르신은 “제주도에서도, 행정안전부에서도 호적 정정이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고모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운 결과 2019년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행안부 직원에게 판결문과 확정증명서를 떡하고 보여주니 그 직원이 ‘지극 정성으로 재판에 임한 덕분’이라며 놀라워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 어르신은 “호적 정리를 마치고 남은 건 정정된 가족관계증명서 종이 한 장이 끝이었다. 이 종이 한 장을 위해 그토록 마음 아파했다는 게 원통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어 유족회는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에 있는 구 대전형무소 터로 향했다. 이제는 사라진 대전형무소의 터에는 수형자를 감시하기 위해 세워진 망루, 허물어진 벽, 화장터와 우물만이 옛 흔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족들은 이제는 허물어진 벽을 향해 이곳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는 제사를 올렸다.
당시 대전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4.3 관련자 300여 명을 비롯해 1800여 명이 있었고, 이들 대부분이 ‘죽음의 터’라 불리는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희생자들이 학살당했던 구덩이를 이은 길이만 1㎞에 달하는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기도 하다.
4대 독자인 강서경 어르신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골령골에서 희생당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안덕면에 살았던 강 어르신의 아버지는 할머니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선 뒤 그대로 끌려가 행방불명 됐다.
강 어르신은 “아버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가족 찾는 방송을 매일같이 봤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대전형무소 수형인 명단에 올라와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해마다 아버지가 희생당한 골령골을 찾고 있다. 고단한 삶을 어찌어찌 살다보니 6남매의 아버지가 돼 있었다. 장사도 하며 집도 장만하고 살고 있다. 여러분도 그 기억을 잊지 말아 달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 대전형무소 터에 남겨진 우물과 화장터를 둘러본 유족들은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