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벗어나겠다”던 검은 머리 오영훈의 노골적인 ‘도의원 길들이기’

[취재수첩] 도정질문 수위에 따라 태도 급변...공세 누그러진 의회

2024-04-18     박성우 기자

민선8기 오영훈 제주도정이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지난 2년간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향후 2년 간의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도정질문이 3일간의 일정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제주 미래를 좌우할 다양한 의제들이 다뤄졌지만, 정작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오영훈 제주도지사의 '태도' 문제다.

도정질문 첫날, 한라산 케이블카 도입을 주장하는 여당 도의원과의 질의응답에서 오 지사는 언성을 높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라산 케이블카 정책의 타당성을 떠나 오 지사의 태도는 매서웠고 고압적이었다. 이후의 질의 역시 제대로 진행될리 만무했다.

17일 보도된 [“기선제압용 윽박?”...도정질문 중 ‘급발진’ 오 지사 언행에 뒷말 무성] 기사는 가벼운 담화를 전제로 4~5명의 의원들의 의중을 물은 내용을 토대로 작성됐다. '뒷말이 무성하다'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의회의 불만은 보다 직설적이었다. 애써 두둔하던 의원 역시 오 지사의 '급발진'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단어가 '의원 길들이기'다. 재선 제주도의원, 재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중앙정치권에서 선진 문물(?)까지 체득하며 의회 시스템을 꿰뚫고 있는 오 지사가 개별 의원의 성향이나 발언의 수위에 따라 태도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8일 속개된 도정질문은 '의원 길들이기'라는 평가가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에는 가차없이 목소리를 높였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질문에는 환한 웃음과 미사여구로 화답했다.

제주도 청년정책과 관련한 도정의 부족함을 지적하자 "데이터 출처가 어디냐", "자의적인 평가가 아니냐"라며 감정적으로 받아쳤다. 질문의 요지와 별개로 "너무 단순한 질문이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과한 비판이다",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등 말꼬리를 잡고 비아냥 댔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빛도 여과없이 드러났다.

곧 이어진 또 다른 의원과의 질의에서는 태도가 급변했다.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나?",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100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의원의 발언에 오 지사는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박수를 받을만한 질의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며 낯 뜨거운 칭찬을 주고 받았다.

이 때문일까. 비록 같은 정당이라 할지라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견제할 것은 확실하게 견제하겠다던 도의회의 결기도 임기 초와 달리 한층 누그러졌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알아서 자세를 낮추는 것으로 비친다. 오 지사가 의도한 결과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겠다.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가 그렇다.

이번 도정질문을 앞두고 45명의 의원들에겐 전에 없던 자료가 한 부씩 송부됐다. '도정질문 답변을 통해 도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핵심과제' 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 자료는 제주도정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60여개 각 실국별 사업이 빼곡히 담겼다. 

오 지사는 제주도 간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줄곧 "도정질문을 도정 홍보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 의원은 "이건 가이드라인이냐?"라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던지기도 했다.

도정질문을 앞두고 각 의원에 전달된 '도정질문 답변을 통해 도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핵심과제' 문건.

4.3진상규명의 최전방에서 싸워온 오 지사가 30대 떠오르는 청년 기수로 제주 정치권에 등장한 것은 2006년, 근 20년 전이다. 제주사회는 정치인 오영훈의 성장드라마를 꾸준히 지켜봤다. 복지 관련 상임위원회 배정을 자처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오 지사는 젊은 시절 '백발'이 트레이드마크였다. 어린 나이가 자칫 의정활동에 발목을 잡을까 염려스러워 줄곧 흰 머리를 유지했다. 민심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랬던 그가 머리색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재선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 이미 한국사회의 주류가 된 운동권 출신의 586세대, 어느 순간부터 젊은이들에게 '꼰대'처럼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던 오 지사는 그 이후 보름에 한 번 꼴로 염색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있다. 청년 정치인에서 기성 정치인으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회자되곤 한다.

노인 또는 기성세대를 비하하는 은어인 '꼰대'는 점차 그 의미가 확장돼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일컫는 멸칭이 됐다. 들을 귀를 막고, 자신이 할 말만 하는 이들이 '꼰대'다. 누구보다 꼰대에서 탈피하고 싶은 이가 정치인 오영훈이었다.

더는 청년이 아닌, 관록의 정치인에게 거는 기대감은 20년 전과는 결이 다르다. 또 달라야 한다. 오 지사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보다 여러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위치에 섰다. '제왕적 권력'을 지닌 도지사의 강경한 태도는 '소신'보다 '오만'으로 비칠 여지가 크다.

한 목소리를 강요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렇기에 정치는 소란스럽다. 여러 주체들의 목소리가 얽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완벽한 사회를 우리는 전체주의라 부른다.

오 지사는 남은 임기 중에도 갖가지 지적과 매서운 검증에 맞닥뜨려야 한다. 듣기 좋은, 또는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얘기만 들어서는 도백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도정질문 말미에 오 지사는 별도 발언 기회를 요청해 "답변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께 성숙되지 못한 표현으로 오해를 불러일으켰거나 마음을 아프게 한 게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저의 불찰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의회의 권위를 세우고 또 도정 발전에 협력하는 동반자로서 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도정질문은 의원들이 도민을 대신해 묻는 자리다. 그렇기에 더더욱 겸손해야 한다. 주권자인 도민들이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아직 임기가 2년이나 남았다고 안주하려든다면 더는 드릴 말씀이 없다. '반성이 없다'는 전 국민적인 분노에도 꿈쩍 않는 용산의 누군가도 임기가 3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