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때 총 맞고 극적 생존, 제주 할머니 됐지만 “이승 왔다 간 흔적이라도”
[4.3 때 뒤틀린 가족 찾기 나선 제주 사람들] ④ 윤옥화(82) 할머니
영문도 모른 채 제주 북촌초등학교에 끌려가 ‘당팥’에서 군인이 쏜 총에 맞고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80대 노인이 가족을 찾고 있다. 윤옥화(82) 할머니는 “이승에 왔다 간 흔적이라도 남겨야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4.3때 북촌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규모 학살은 수많은 피해를 낳았다. 북촌초와 당팥이라 불리는 인근 공터 등에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고, 마을 자체가 군인들에 의해 모조리 불에 탔다.
마을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인근 마을인 함덕으로 피신했지만, 함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 일부만 살아 남았다.
함덕에서 2~3개월 정도 살던 주민 상당수는 고향 북촌으로 돌아와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지어 다시 마을을 일궜다.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움막은 비바람조차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 밭에 가서 일을 돕고, 물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주민들을 향한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시선은 북촌 사람들을 움츠리게 했다.
4.3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면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이미 수십년의 세월을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야속한 세월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감하기 힘들다.
북촌 민간인 학살로 목숨을 잃은 윤수학과 박영심 부부는 자식 다섯을 뒀지만, 가족관계등록부(호적)상 윤수학은 미혼이다.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면서 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호적도 뒤틀렸다.
1949년 1월17일 마을을 찾은 군인들은 총구를 겨누면서 주민들을 북촌초에 모이라고 겁박했다. 신발을 신지도 못하고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주민들이 북촌초로 향할 때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질렀다.
윤수학, 박영심 부부와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윤옥순, 윤옥자, 윤태삼, 윤옥화, 윤옥희 5남매도 두려움에 떨면서 북촌초로 향했다.
같은 날 북촌초와 인근 옴팡밭, 당팥에서 윤수학(당시 58)과 박영심(당시 50), 윤옥순(당시 18)이 총살 당했다. 박영심의 주검 아래에는 유일한 아들 윤태삼(당시 11)이 깔려 있었다. 박영심이 수십발의 총알을 혼자 맞으면서 하나뿐인 아들을 살린 셈이다.
5남매 중 둘째인 윤옥자(당시 15)는 같은 집에서 살던 백모(윤수학의 형 윤우학 아내)의 도움으로 목숨을 간신히 건졌다. 당시 7세였던 윤옥화 할머니는 막내(옥희, 당시 5)와 함께 몸에 총알이 박힌 채 둘째(옥자), 셋째(태삼) 언니와 함께 함덕으로 피신했다.
윤옥화 할머니와 윤옥희 몸에 박힌 총알은 북촌마을 어른이 제거해줬다. 어르신은 주변에 있던 쑥을 짓이겨 상처에 발라줬다. 윤옥화 할머니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지만, 손과 발, 몸통 곳곳에 총알이 박힌 막내는 끙끙 앓다가 3개월 정도 지나 끝내 삶을 마감했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함덕과 북촌 사이 어딘가에 막내의 시신을 묻었는데,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백모는 살아남은 3남매(옥자, 태삼, 옥화)를 자신과 윤우학의 자녀로 호적에 올렸다. 4.3 와중에 부모(윤수학, 박영심)를 잃은 3남매의 뿌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윤옥화 할머니는 “어릴 때 일이라고 하지만, 너무 충격적이어서 잊혀지지 않는다. 4.3때 살아남았지만 먹고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는 학교 근처에 가본 적도 없고, 할줄 아는 것이 없으니 남의 집 밭일을 돕고, 물질하면서 곪은 배를 채웠다. 지금이야 전복, 소라가 인기있지만 당시에는 미역만 캐다 팔았다”고 말했다.
이어 “백모가 없었으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 힘든 세월을 백모 덕에 견딜 수 있었다. 정말 생명의 은인”이라며 “현재 언니(윤옥자)와 둘만 살아 있다. 오빠(윤태삼)도 몇 년 전 병으로 죽었다. 몸에 손가락만한 총알이 박혔는데, 지금도 가끔씩 상처가 쓰라린데, 아픈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더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윤옥화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언니, 동생까지 이승에 왔다 간 흔적이라도 찾아야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뒤틀린 호적 정정에 나선 윤옥화 할머니는 제주4.3 피해자 중에서 자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평생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화장한 뒤 땅에 묻은 줄 알고 살았는데, 몇 년전 가족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화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파묘해 부모님의 온전한 뼈를 찾았고, 심지어 뼈에서 DNA도 검출됐다. 올해 3월에는 뼈에서 검출된 DNA와 윤옥화 할머니의 DNA가 ‘일치’한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호적 정정을 위한 가장 객관·과학적인 자료를 확보한 셈이다.
4.3 피해자 중 희생자의 시신을 갖고 있는 사례가 많지 않은데, 70여년간 땅에 묻힌 시신에서 온전한 뼈를 찾는 일도 드물거니와 DNA까지 검출되는 사례는 많지 않다.
윤옥화 할머니는 DNA 검사 결과를 토대로 가족관계 정정을 위한 가사소송 등을 준비하고 있다. 70여 년만에 뒤틀린 가족관계가 바로 잡히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