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찾았다 ‘조작간첩’ 된 재일제주인…故고찬호 죽고 나서 억울함 풀었다!

[제주간첩조작사건] 진실화해위, 재일동포 고찬호 인권침해사건 ‘재심 권고’ 어머니 뵙고 돌아가는 길 제주공항서 연행…60일간 가혹 행위 끝 허위자백

2024-05-16     김찬우 기자

고향 제주를 찾아 어머니를 뵙고 돌아가는 길, 누군가에 끌려간 뒤 갑자기 ‘간첩’이 됐다.

말도 안 되는 갖갖 것들을 가져다 붙이고 가혹 행위를 통해 거짓으로 자백을 받아낸 독재 정권의 폭정 속 만들어진 간첩이 된 재일제주인 故 고찬호씨 사연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김광동, 이하 진화위)는 14일 열린 제78차 위원회에서 ‘재일동포 고찬호 인권침해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진실규명으로 결정했다.

고찬호는 고향 제주를 찾았다가 간첩 조작사건에 휘말려 7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후 출소 30여 년이 지나, 그것도 이승을 떠난 이후에야 억울함을 풀어낼 진실이 규명됐다.

1940년 11월 제주에서 태어난 고찬호는 1960년대 이모가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영주권을 취득한 뒤 도쿄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 관련 일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1976년 4월, 조상들의 묘를 벌초하는 ‘모국성묘단’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갔으며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향 제주도 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향과 일본을 오가던 고찬호는 여느 날처럼 제주도에서 일본행 항공기를 타러 간 1986년 8월 25일 제주국제공항 대합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508보안부대 수사관들에 의해 끌려갔다.

508보안부대는 민간 기업 형태 ‘한라기업사’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보안사의 제주지부다. 당시 도민사회에는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다녀온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진화위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진술한 여동생 고원순 씨는 “오빠가 성묘단으로 활동하면서 가끔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왔다. 이날도 일본에 간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일본에서 올케언니 연락이 와 오빠가 집에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아보니 한라기업사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라기업사 수사관들은 고찬호가 일본과 고향인 제주도를 오가며 간첩 활동을 펼쳤다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 행위 등 강압 수사를 자행했다. 도청이나 경찰청, 제주문화방송국, 북제주군청 위치 등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도 ‘죄’가 됐다.

고찬호는 1986년 8월 25일 끌려간 뒤 고문을 비롯한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해 끝내 거짓 자백으로 죄를 인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뒤 항소심과 대법원 재판에서 잇달아 상고가 기각되며 형이 확정됐다. 

진화위가 이 사건의 판결문, 수사공판기록, 국군방첩사령부 수사기록, 행형기록, 유족 및 당시 508보안부대 수사관 등을 조사한 결과 군사독재 정권의 악랄한 만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한라기업사)가 영장 없이 60일 동안 불법구금한 채 조사한 것부터가 문제다. 또 변호사와 가족 접견이 금지된 상태에서 별다른 증거 없이 혐의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가혹 행위 등 강압적인 조사를 펼친 것도 위법이다.

한라기업사 수사관들은 고찬호와 참고인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다른 수사관 이름을 도용해 수사기록을 작성, 안기부 수사관 명의를 허위로 기재키도 했다. 

1986년 12월 8일 제주지법으로 기소되기까지 제주검찰은 고찬호가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묵인한 채 수사지휘기관으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제주법원은 공판과정에서 고찬호가 불법적인 수사에 대해 호소했음에도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및 허위 작성 수사기록 등을 유죄 증거로 채택해 재판하고 중형을 선고했다.

이에 진화위는 “검찰은 국민 인권을 보호할 공익 대표기관으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했고, 법원은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 기관으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일갈했다.

진화위는 “고찬호가 보안사로부터 불법구금 및 가혹 행위 등 강압적인 수사로 인해 인격권, 신체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을 침해당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꼬집었다.

이어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국군보안사령부가 불법구금 및 고문 등 가혹 행위, 허위자백 강요 및 허위공문서 작성 등으로 위법한 수사를 한 점에 대해 피해자 및 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해자 및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관련해 재일동포 인권침해 사건 진화위 조사를 청구한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소속 이동석 씨는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영문도 모른 채 옥살이를 한 분들의 억울함과 명예회복을 위해 조사를 청구했고 진실규명 결정이 나와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락처를 모르거나 한국과 연을 끊은 사람들이 있어 동우회에서 연락할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다”며 “진화위 활동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재일동포들의 억울함이 다 풀리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