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소’ 자아낸 증거, 검찰도 “무죄” 구형…간첩조작 억울함 풀릴까

[제주간첩조작사건] 42년만 다시 열린 재판, 故김두홍 재심 공판

2024-12-17     김찬우 기자
제주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인 고(故) 김두홍 씨에게 내려진 잘못된 판결을 되돌릴 ‘재심’ 첫 공판이 17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이뤄졌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42년 만에 제대로 ‘무죄’를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실소만 터져 나오는 효력 없는 증거에 변호인은 죄가 없음을 주장했고 사건을 살펴본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처럼 검찰과 변호인 모두 ‘무죄’를 구형한 가운데 정작 피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제주지방법원 제1형사부는 17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고(故)김두홍 재심 사건 공판을 진행했다. 재심 청구는 큰아들 김병현 씨가 했다.

이날 검찰은 “당시 고인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협했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고인은 1982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 공소사실로 재판을 받아 같은 해 11월 30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2월 18일 열린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의 형이 선고됐다.

고인은 큰집의 제사와 벌초를 모두 대신한 고마움으로 초청받은 일본에 관광차 다녀온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친척을 만났다는 이유로 간첩 누명을 썼다. 

일본에 다녀온 뒤 끌려간 고인에게 공안당국은 일본에서 반국가단체(북한)에 동조하고 제주에 돌아온 뒤 이를 찬양, 남한을 비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적법한 구속영장도 없이 고인을 끌고 간 공안당국은 불법 구금한 채로 고문 등 가혹 행위와 함께 자백을 강요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고인은 1982년 7월 20일 제주경찰서 대공과 수사관들에게 붙잡혀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8월 5일까지 17일간 불법 구금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진술을 강요받으며 가혹한 고문도 받았다.

수사과정에서 범죄 사실을 받아내기 위해 진술을 강요하며 잠을 재우지 않는 등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검찰 지휘가 있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으며 대기하라’고 한 사실, 검찰에서도 고문을 가할까 봐 겁나 자백했다는 고인의 진술 등이 파악됐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故 김두홍 씨는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조국을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러나 공안당국은 이런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을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문 후유증과 간첩이라는 낙인에 고인은 누가 찾아오면 땔감으로 쓰기 위해 쌓아놓은 보릿대 속을 비집고 들어가 숨었으며, 술을 됫병으로 사와 들이키곤 했다. 또 조상에게 잘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며 억울함에 제삿상을 뒤엎기까지 했다.

배워봐야 소용없는 세상이라며 학교에 가야 하는 자식들의 책가방도 모두 불태웠다. 술 없이는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없는 세상. 간첩으로 만들어진 故김두홍의 세상은 지옥이었다. 고인의 자녀들 역시 아버지의 간첩 누명 때문에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

재심 사건을 맡은 문성윤 변호사는 “회합죄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이나 지령을 받은 사람과 연락한 경우인데 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사실오인을 주장했다. 

이어 “고인이 일본에 가서 조총련계 친척을 만났을 때 북한을 찬양하거나 이에 동조한 사실이 없다. 오히려 제주도에 와보라며 (북한이 주장하는)실상과는 다르다는 말도 했다고 전해진다”며 “당시 재판에서 인정된 사실 중 거짓된 내용이 많다”고 강조했다. 

또 “귀국 직후 정자나무 아래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주장을 늘어놨다는 사실도 거짓이다. 이 밖에도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인정된 사실이 나타난다”며 “구천을 떠도는 망인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판결을 내려달라”고 무죄를 요구했다. 

재판장이 유족에게 발언 기회를 부여하자 큰아들 김병현 씨는 “아버지가 끌려갔다 돌아온 뒤 고달프게 살았다. 동생은 해군사관학교 합격 후 신체검사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떨어졌다.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없었다. 그때는 연좌제가 있을 때라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 일본에 가서 간첩죄를 뒤집어썼나 우리 남매들끼리 한탄하며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다”며 “이런 점들을 참고하셔 현명한 판단 내려주시길 바란다”고 무죄를 호소했다.

고인의 딸 김미정 씨도 “나도 일본에 가서 아버지가 간첩죄를 뒤집어쓰는 데 결정적 이유가 된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아버지는 잡아갔으면서 왜 나는 안 잡아가나. 너무 억울하다. 학교 다닐 땐 쟤네 아버지 교도소에 갔다고 손가락질도 받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故김두홍은 한국전쟁 당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수류탄 파편이 정수리 부근에 박힐 정도로 목숨을 다 바쳐 조국을 지켜낸 ‘국가유공자’였지만, 한순간에 간첩이 됐다. 그런 고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오는 1월 열릴 선고 재판에서 판가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