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설 지나고 요양원 갑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20) 나는 아흔 다섯 엄마를 포기한 걸까요?
엄마의 짧았던 봄날
1932년생인 엄마는 작년 5월 낙상을 하고 골반이 깨졌는데 다행히도 인공 골반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두 달 동안, 내가 간병을 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잘 견뎌낸 엄마는 퇴원을 하고 집에서 몸조리를 했습니다. 오롯이 제가 돌봤습니다. (관련 기사 : 90 넘은 엄마의 인공골반수술...아들 간병의 시작)
자리물회를 먹고 싶다는 엄마를 위해 서귀포 보목포구에 가서 자리돔을 사고, 물회를 자주 해드렸지요. 자리돔은 넉넉하게 사서 깨끗하게 다듬고 급랭을 시켜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냉동실에 준비했었습니다.
밥도 잘 먹고 보행연습도 열심히 한 덕분에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엄마는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그곳에서 활동도 하고, 바깥놀이하고, 엄마의 봄날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봄날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복지관에 다니기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손에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감각이 없어져서 손에 쥔 것을 자꾸 떨어뜨렸고 숟가락을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리도 힘이 빠져서 스르르 주저앉아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검사를 해도 고령에 노화가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날이 바뀌는 시간을 택해 음식을 차려 당에도 가서 비념하고 정성을 들였습니다.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져 어쩔 수 없이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나가는 걸 그만둬야 했습니다. 내가 더 아쉬웠습니다. 엄마의 행복이고 즐거움이었으니까요.
온 가족의 엄마 돌보기
하루 종일 엄마가 집에 있게 되자, 우리 가족은 각자 엄마 돌보기에 맞춰 분담했습니다. 방문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시간을 빼고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라 적응해야 했습니다. 때 맞춰 밥을 먹여드리고, 시간마다 기저귀를 가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내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엄마의 기저귀를 갑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했던 일이라 기저귀 갈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당연히 엄마의 대·소변을 봐야하는 일입니다. 기저귀를 갈고 따뜻한 수건으로 엉덩이 부위를 닦은 뒤, 바디로션을 발라주면 엄마는 참 좋아했습니다. 일으켜 세워 유산균을 먹이고 보청기를 끼워주고 라디오를 틀어줬습니다.
내 몫을 하고 감귤 농장에 갑니다. 농장일이 없을 때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합니다. 각시는 엄마의 세수를 시키고 부랴부랴 출근합니다. 아침식사를 포함한 하루 세 시간은 요양보호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점심에는 각시가 집에 다시 와서 점심을 드리는데, 그렇지 못하면 가족 대화방에서, 누가 대신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결정했습니다.
주로 내가 하는데,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시간을 서로 조절했습니다. 주말에 나와 각시가 둘 다 감귤농장에 가면서, 아이들에게 할머니 식사 잘 챙겨드리라고 가족 대화방에 남겼더니 서로 순번과 할 일을 정해서 각자의 몫을 잘 했더군요. 주말에 목욕을 시키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들 서로의 몫을 하면서 돌보기 분담을 했습니다.
나는 국이 꼭 있어야 밥을 먹는 엄마의 평소 식습관에 맞추어 국을 여러 가지로 준비했습니다. 고사리육개장, 몸국, 된장국, 콩국, 소고기미역국 등을 한 번 끓일 때 넉넉하게 해 두고, 1회 용기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여 번갈아 가며 드렸습니다.
최선의 선택이라 믿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자주 생겼습니다. 허둥대다가 그 일이 해결되면 한 고비 넘겼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또한 엄마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하루에 두 세 시간 동안 마음 졸여야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했고, 우리 가족끼리의 역할 분담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엄마 옆에 오롯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각시는 직장을 다니고 대학생인 아이들이 그 역할을 종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 밖에 할 사람이 없는데. 두 달 간병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간병은 퇴원이라는 출구가 있는데, 문화관광해설사는 잠시 뒷전이라도 감귤농사까지 접으며 엄마 옆에 종일 붙어 지내는 것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요?
요양원 얘기를 내가 먼저 꺼냈는지, 각시가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같았다는 것이겠지요. 나와 각시가 요양원 얘기를 꺼내 놓고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엄마가 낯선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주말 저녁을 먹고 아이들에게 먼저 엄마의 요양원 입소를 얘기했습니다. 아이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아이들에게 각시가 “할머니에게 요양원이 더 좋은 환경일 수 있어”라고 했습니다. 각시도 그 말을 하고는 눈물을 붉혔습니다.
정작 엄마에게 요양원 입소 얘기를 꺼내는 게 참 힘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내가 “요양원가면, 말벗도 있고 잘 챙겨주고 좋을 수 있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 말에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난 그디 가민 느네 돈 하영 들카부댄 저들어저라. 개난 요양원 가민 돈 막 하영 드는거 아니라?”
(나는 그곳에 가면 너희들이 돈 많이 들까봐 걱정했어. 그래서 요양원은 돈 많이 드는게 아닐까?)
다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아무렇지 않은 말투는, 요양원 가는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게 아닌 걸, 나도, 각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말이겠지요. 엄마에게 돈 별로 안 든다 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이 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 음성을 차분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느네 나 돌앙살잰허난 막 속았저. 요양원가도 느네가 돈들이멍, 속아살건디…, 어떵헐거라 어멍이고 할망이난 어디 데껴불지도 못허곡, 고맙다. 나가 그 고마움을 무사 모르느니? 막 고맙다.”
(너희가 나와 같이 살려고 하니, 정말 고생했다. 요양원가도 너희가 돈 들고 고생할건데…, 어쩌겠니? 엄마고, 할머니라서 어디 버리지도 못하고, 고맙다. 내가 그 고마움을 왜 모르겠어? 정말 고맙다.)
엄마의 말에 나와 각시, 그리고 아들, 딸은 약속한 것처럼 숨을 죽였습니다. 다들 똑같은 마음으로 혹시나 음성에 울음이 섞일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살아 계신 엄마가 잘 먹는 음식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살과 비계가 적당히 섞인 삼겹살도 삶아 먹기 편한 크기로 잘라 먹여드려야겠습니다. 밥도 물을 넉넉하게 넣어 엄마가 좋아하는 진밥을 지어야겠습니다.
우리 엄마는 이번 설을 지내고 요양원 가기로 했습니다. 슬퍼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래도 앞이 안 보이는 엄마를 등 떠미는 것 같아 못내 미안함과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불효자일까요?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강충민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국문학, 제주신화(설문대 설화)를 공부했습니다.
글 쓰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좋은 사람과 얘기 나누고, 제주의 자연을 좋아합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여행사, 향토음식점등, 좋아하는 다양한 직업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현재는 서귀포 효돈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있고, 제주돌문화공원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 www.jejungo.net )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