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과 함께 시련 극복한, 탐라국 대표 잉꼬부부 이야기

[서명숙 올레길 편지] 9. 기정이와 복자의 열 번째 완주

2025-06-06     서명숙

이 글은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라는 타이틀로 제주올레 공식 블로그에 연재 중인 올레길 단상입니다. [제주의소리]가 ‘서명숙 올레길 편지’라는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면서 누구나 길과 하나가 되어 가슴에 맺힌 상처나 갈등을 치유하고 평화와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 편집자 주

2024 제주올레걷기축제가 남긴 여운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던 즈음, 5코스 안내사로 일하는 복자 씨에게서 문자가 날라들었다. 요지인 즉 자기네 부부가 얼마뒤에 7-1코스를 마지막으로 열 번째 완주를 하게 되는데, 그날 혹시 완주증을 직접 줄 수 있느냐는 것. 아니 그들 부부가 벌써 열 번째나 완주를 한단 말인가? 놀랍기 그지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근래에 부쩍 늘어난 외국인 완주자들에게 마음을 뺏기다 보니 정작 가까운 이들 소식은 대충 설렁설렁 지나친 게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약속 시간을 정해서 문자를 보내고 나니, 그들과 얽히고설킨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5코스 안내소 안내사 김복자와 그녀의 남편 한기정은 내게는 그야말로 ‘동네 아시들(동생들)’이었다. 우리는 서귀포 서귀 3리 587번지 매일시장통 가겟집 아이들이었다. 우리 집은 식료품 가게, 한기정네는 신발 가게, 복자네는 담배가게. 두 사람은 나보다 1년 후배인지라 같은 초등학교를 5년이 나 같이 다녔고, 복자는 여중도 같이 다녔다. 그러다가 한기정은 고려대에서 또다시 선후배로 만났으니 삭막하고 외롭고 드넓은 서울에서 만난 반가운 ‘고향 까마귀’였다.

이야기 주인공인 젊은 시절의 한기정, 김복자 씨의 모습 / 사진=제주올레 블로그

후배 한기정이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고 역사 선생님이 되었고,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참하기로 소문난 동창생 복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전해 들었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산티아고 길에서 고향 제주에 길을 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귀국해서 그해 겨울 서귀포로 내려와서 탐색전을 벌일 때였다. 단순히 풍광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깃든 길을 연결하는 것이 내 목표이자 비전이었다. 제주 토박이로서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기정이는 그런 측면에서 올레길 공동 개척자로는 맞춤형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학업 성적도 탁월했지만 축구와 달리기 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던 그는 탐사대원으로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으로 여겨졌다.

더 반가운 건 기정이도 나처럼 일찍 직장을 때려치운 것이었다. 그는 유기농법에 푹 빠져서 본격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기 위해 사표를 던진 참이었다. 그에게 제주도를 두 발로 걸으면서 풍광은 물론 지질, 역사, 문화, 제주 해녀의 생활상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길을 만들고자 한다는 내 구상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평일에는 사업 일로 바쁘거니와, 주말에는 활쏘기 동호인회 활동으로 도무지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축구나 활쏘기처럼 동적인 스포츠를 좋아하지 걷기는 별로라는 서운한 말까지 보태면서.

정작 남편 대신 부인이 관심을 보이고 나섰다. 자그마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복자는 뜻밖에도 지역 주민으로는 보기 드물게 올레길 걷기에 열성적이었다. 과수원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올레길을 걸었고, 아카데미 교육을 받는가 하면, 길동무와 지킴이 활동에 적극 나섰다. 부인은 걷기, 남편은 활쏘기. 취미는 달랐지만 둘은 여전히 잉꼬부부였다.

부부가 운영하는 유기농 레몬 농장 / 사진=제주올레 블로그

그런 그들의 가정에 날벼락같은 재앙이 닥친 건 2017년 1월 말. 남편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고 의식이 전혀 없다면서 통곡하는 복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안이 벙벙했다. 중년의 나이지만 언제나 축구부 주장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준족의, 건강미 넘치는 기정이 아니었던가. ‘서귀포의 손기정’으로 불리던 기정이가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가 되었다니! 복자는 그제야 실은 남편 기정이가 이상만을 쫓아 시작한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왔음을 털어놓았다.

재앙이 갑작스럽게 닥친 데 비해서 회복 속도는 복장이 터질 만큼 느리고 더뎠다. 겨우 의식은 회복했지만 몸은 여전히 불편하고 말도 어눌해서 한동안 서귀포 의료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그가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옛 제자 간호사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건 그해 4월초.

병원에 있는 동안 기정이는 복자가 그토록 좋아하는 올레길을 퇴원만 하면 꼭 같이 걸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더란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동안 집에서 양손으로 일하기, 글자 쓰기만 하던 그는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강아지 목줄을 아픈 오른손에 묶고 집에서 1km여 떨어진 보목 하수처리장까지 걷기 시작했단다. 강아지가 움직일 때마다 손목 통증이 너무 심해서 날마다 울면서 걸었단다. 그야말로 '눈물의 산책'이었다. 그런데 강아지가 주인에게 안겼던 고통이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혹독한 통증을 겪으면서 손의 기능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으니, 후배 의사마저 놀랄 정도였단다.

제주올레길을 함께 걸었던 부부 / 사진=제주올레 블로그

가을로 접어들면서 오른손과 다리의 불편함이 가시기 시작하자, 그는 강아지를 떼어놓고 혼자길을 나섰고 산책 거리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단다. 집에서 조근개까지, 보목포구까지, 방송국 터까지, 게우지코지까지. 한번은 조근개에서 저혈당으로 길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가 아테네 그루네발트 언덕의 기적을 일궜다면, ‘서귀포의 손기정’으로 불렸던 한기정은 게우지코지의 기적을 일군 셈이었다. 

그해 12월 초 마침내 그는 혼자서 제주올레 6코스 완주를 해냈고, 12월 9일에는 병상에서 소원했던 ‘복자씨와의 동반완주’를 처음으로 해냈다. 그들 부부가 올레길 전코스(당시에는 26개 코스 425킬로미터)를 완주한 것은 그로부터 6개월 뒤인 이듬해인 2018년 5월 31일이었다.

그들 부부의 목표는 80세까지 50회, 죽을 때까지 100회 완주

제주올레 이사장 이전에 동네 누님이자 언니로서 의식불명에서 첫 번째 완주까지 기정이네 부부를 초조하게 지켜봤지만, 그뒤로는 그들의 완주에는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그들이 그 뒤로도 그렇듯 꾸준히 올레길을 걷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만 한기정이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난 뒤에는 올레지킴이, 탐사팀 일도 거들어야 하는 그린리더를 거쳐서 요즘에는 ‘시작올레’의 열성적인 멤버로 맹활약중이라는 것만 전해듣고 있었다.

2024년 11월 26일,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10번째 완주증을 수여했다 / 사진=제주올레 블로그

10번째 완주증을 수여하는 날. 복자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날 마주치자마자 남편 자랑부터 늘어놓았다.

“마지막 완주 7-1코스는 기정씨 시작올레 가이드하는 날로 일부러 잡았는데요. 정말 설명을 얼마나 조근조근 잘하는지 감탄했다니까요. 고근산의 유래부터 서귀포시에 대한 설명까지, 정말 대단했어요.”

탐라국의 대표적인 사랑꾼 복자다운 멘트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함께 했는데도 아직도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그뿐인가. 평소 여리여리하게만 보이던 복자는 완주 소감 대신에 당찬 포부를 펼쳐 보였다. “일 년에 두 번씩 완주하니까 계산해 보니 80살 될 때까지 50번은 할 수 있겠더라고요. 80살 이후는 농사일도 다 접고 올레길만 걷게 될 테니까 오래만 살면 죽을 때까지 100번 정도는 완주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 부창부수라더니. 기적을 일궈낸 남편 못지않게 기적의 최대 조력자였던 부인다운 이야기다. 그들 부부의 열 번째 완주가 더더욱 반가운 이유는 그들이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제주의 주인인 토박이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제주의 환경을 ‘오고생이(고스란히)’ 지켜내야 한다고 깨닫는 것이 올레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하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 저 멀리 안성에서 국제선과 국내선을 타고 이곳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고맙다면, 토박이들의 발걸음은 든든하다!

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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