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짓이긴 고문, 제주간첩조작 피해자 강광보씨 감사패 받아
보상금 들여 만든 간첩조작사건 홍보관 ‘수상한 집’ 운영 공로 ‘남영동 대공분실’서 UN 국제 고문 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개최
없는 죄도 만들어내 뒤집어씌웠던 군부 독재정권의 상징과 같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상한 집’을 운영하는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광보씨가 감사패를 받았다.
고문으로 짓이겨진 세월이었지만, 국가폭력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국가 보상금과 집까지 내놓으며 간첩조작사건 홍보관인 ‘수상한 집’을 건축, 운영 중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지난 25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옛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에서는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숲’이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 등이 주관한 ‘UN 국제 고문 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UN 국제 고문 피해자 지원의 날’은 1987년 유엔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6월 26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고문 근절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유엔 협약이 발효된 1987년은 그해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 열사가 경찰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해다. 이 사건은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6‧10항쟁’의 기폭제가 돼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역사적인 변곡점이 됐다.
이날 행사가 열린 민주화운동기념관은 바로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한 서울 남영동 경찰대공분실 마당에 지어져, 지난 6월 10일 문을 연 곳이다.
이날 행사에서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강광보씨의 감사패는 건강 문제로 행사장에 못한 강씨 대신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 받았다. 김 이사장은 취임 직전까지 제주간첩조작사건을 조사하며 피해자들이 무죄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제주조작간첩사건은 힘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국민을 골라잡아 누명을 씌운 군사 독재정권의 대표적인 만행이다. 제주4.3 당시 피바람을 피해 일본을 다녀온 도민들은 이들의 표적이 됐다.
제주시 화북동 출신인 강광보(1941년생) 씨는 4.3 당시 일본으로 몸을 피한 아버지를 만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1962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현지에서 제주사람을 만나 아이도 낳았지만, 1979년 당국에 적발돼 제주로 귀향했다.
그러나 강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로 끌려간 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과의 관련성 등 간첩 혐의를 인정하라는 허위자백 유도 고문을 당했다. 이후 박정희 사망으로 풀려났지만, 전두환 정권인 1986년 1월, 다시 끌려갔다.
강씨가 끌려간 곳은 다녀오면 불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가한다는 제주도 보안사령부, 이른바 ‘한라기업사’였다. 그는 가족까지 위협하는 협박과 고문에 허위로 자백했고 속전속결 재판을 통해 간첩 혐의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온갖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억울하게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낙인찍힌 지 31년 뒤인 2017년 강씨는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들의 후원금을 들여 자신이 살던 집을 간첩조작사건 홍보관 ‘수상한 집’으로 개조했다.
제주4.3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조작과 날조로 한순간에 ‘빨갱이’를 만들었고 불법 구금한 뒤 고문을 가해 죄를 뒤집어씌웠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이후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으로 건너간 도민들은 일본 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 친척이나 지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공안기관에 불법 구금되거나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사)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가 발간한 ‘2022년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심층 인터뷰가 이뤄진 12명 가운데 10명이 일본과 관계됐다.
UN 국제 고문 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에는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신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4.3평화상 위원 이석태 변호사 ▲유은혜 김근태재단 이사장 ▲고문피해자, 인권운동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에서는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상영하고 피해회복 지원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가 이뤄졌다. 또 인권 단체 대표들의 발언과 함께 고문을 근절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기 위한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김종민 이사장은 “제주에선 4.3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숨졌고 이후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고문에 못 이겨 간첩으로 조작돼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다”며 “고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파괴하는 범죄며,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문을 근절하고 피해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책무이자 책임”이라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