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널’ 실사판…그는 왜 제주공항에 4개월간 갇혔나

[환대받지 못하는 이방인] ② 난민 심사 가로막는 불회부 결정

2025-08-28     원소정 기자

제주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지 20주년,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된 지 24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평화’와 ‘자유’의 이름 뒤 난민 심사 문턱까지 가지 못한 채 ‘불회부 결정’과 이름도 생소한 ‘T-2 비자’ 속에 갇힌 이들이 있다. 일할 권리도, 지원도 없이 난민도 불법체류자도 아닌 ‘숨만 쉬는 존재’로 살아가는 현실. [제주의소리]는 그 높은 벽과 법적 사각지대, 그리고 그 안에서 버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제주가 벼랑 끝에 내몰린 난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묻는다. [편집자 글]


영화 '터미널'의 한 장면.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가 공항 의자를 침대 삼아 잠을 청하고 있다. 제공=CJ 엔터테인먼트

2004년 개봉한 영화 ‘터미널’에서 톰 행크스가 맡은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는 하루아침에 공중에 떠버린 존재가 된다. 모국에서 정권이 무너지고 여권과 비자가 무효가 되면서, 미국 공항에 도착한 그는 입국도, 출국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된다. 그는 공항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몇 년간을 그 안에서 살아야 했다. 공항 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공항 내 상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다른 여행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버텼다. 영화는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 2월 제주국제공항에 닿은 에마뉴엘씨도 영화 속 나보스키와 같이 ‘공항 난민’으로 4개월을 버텼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공항 체류 시설의 현실은 이랬다.

▲ 5m×7m 남짓한 크기의 방, 창문은 없고 불빛은 늘 켜져 있었다.
▲ 얇은 매트에 담요 한 장을 덮고 잠을 잤다.
▲ 네 명이 한 방에 붙어 자면서 전염병 위험이 컸다.
▲ 비누·세면도구가 점차 부족했다.
▲ 4개월 동안 운동할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한해에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오가는 제주공항. 그러나 같은 공간 안에서도 난민 신청자들은 도민과 관광객과 철저히 분리된 채, 공항 밖 땅을 밟을 수조차 없었다.

왜 그들은 공항에서 나올 수 없는가. 그 배경에는 ‘난민 심사 불회부 결정’이라는 제도가 있다. 불회부란 난민 신청 자격조차 인정받지 못해 본 심사 단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절차다.

제주국제공항 국제선 도착장. ⓒ제주의소리

난민 신청은 일반적으로 입국심사대에서 의사를 밝히는 순간 시작된다. 신청자는 난민심사 회부 절차를 거쳐 법무부의 정식 조사를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난민 인정 여부가 판단된다.

그러나 법무부가 “명백히 이유가 없는 신청”이라고 판단하면, 정식 심사로 넘기지 않고 곧바로 불회부 결정을 내려 신청 자격 자체를 부정한다. 이 경우 신청자는 공항에 억류된 채로 머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무사증 제도를 이용해 관광 목적으로 입국한 것처럼 공항을 통과한 난민 신청자는 곧장 정식 난민 심사 절차에 들어갈 수 있지만, 공항 현장에서 난민 신청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회부 결정을 받은 사람은 공항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정식 심사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에마뉴엘씨와 같이 ‘불회부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하기도 전에, 출발선에 서보기도 전에 법적 싸움부터 시작해야 하는 구조다.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 자료에 따르면, 제주 무사증 제도가 시행된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난민 심사 불회부 건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2016년 7건을 시작으로 ▲2017년 7건 ▲2018년 51건 ▲2019년 24건 ▲2022년 5건 ▲2023년 48건 ▲2024년 44건 ▲2025년(6월 기준) 12건 등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법무부는 불회부 판단 기준에 대해 “난민법 시행령 제5조(출입국항에서의 난민신청자에 대한 난민인정 심사회부) 제1항 요건에 따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불회부 결정을 받은 난민은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변호사를 선임해 불회부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길밖에 없다. 자료에 따르면 이 소송은 ▲2022년 3건(패소 2건) ▲2023년 3건(패소 3건·항소 3건) ▲2024년 9건(패소 9건) ▲2025년 6월 기준 6건(패소 2건·항소 11건)으로 진행됐다. 주목할 점은 난민 신청자들이 제기한 거의 모든 사건에서 법원이 “심사 자격은 줘야 한다”며 난민의 손을 들어줬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법무부는 불회부 결정에 이어 항소하면서 더 높은 문턱을 세우고 있다. 자유를 찾아온 난민들은 ‘공항의 감옥’에서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로만 알았던 ‘공항 난민’은 지금 이 순간, 제주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