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공직-인민군-국군’ 굴곡진 삶 제주4.3희생자 ‘명예회복’
[4.3재심, 역사의 기록] (122) 제주4.3 피해 故김상연 무죄
초등학교 교사에서 읍사무소 직원이 됐다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징집된 이후 대한민국 국군으로 복무를 마친 기구한 삶을 살아온 제주4.3 희생자가 뒤늦게 명예를 회복했다.
억울한 사연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뒤 자녀들에 의해 회복한 명예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는 23일 오후 고(故) 김상연의 자녀가 신청한 제주4.3특별법에 따른 재심을 통해 내란 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고인은 1947년 제주지방심리원(현 제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1000원을 선고받았다. 무허가 집회에 동참하고 반정부 활동 결의문에 날인한 혐의다.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듯했지만, 이듬해 다시 법원으로 끌려가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때는 성명불상의 남로당 관계자와 함께 무력을 행사하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혐의였다.
이 같은 공소사실이나 재판 결과와는 달리 사실 고인은 평범한 삶을 살았던 교사일 뿐이었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벌어진 재판으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변했다.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그가 제주읍사무소 직원이 됐다가 인민군으로 징집되고 또 국군으로 복무하게 된 것이다.
이날 재판도 다른 4.3재심 사건과 마찬가지로 검사는 피고인 고인의 명예회복을 바란다며 무죄를 구형했고 변호인 역시 범죄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발언 기회를 얻은 고인의 아들 김정철 씨는 생전 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놨다.
김씨에 따르면 고인은 당시 해방 무렵 외도국민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 업무를 도맡았다. 1947년 3.1총파업 당시 공문을 붓글씨로 써 모두가 볼 수 있게 게시하기도 했다.
단순히 학교로 온 공문을 다시 게재하고 연설했을 뿐인 고인은 어느덧 주동자가 됐고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끝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교장이 시키는 대로 하고, 총도 쏠 줄 모르는 데다 더욱이 폭도도 아니었지만, 결혼한 지 한 달여 만에 주동자로 몰려 죄인이 됐다. 학교에서는 그를 파면했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읍사무소에 취직했지만, 이듬해 다시 끌려가 1948년 12월 3일 1차 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
결혼한 뒤 아들이 태어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끌려간 고인은 목포를 거쳐 서울 마포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 형무소로 들이닥친 인민군을 마주하게 됐다.
서울시청 앞에서 취조를 받은 고인은 고향인 제주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인민군은 강압적으로 고인을 징집시켜 데려갔다. 이후 고인은 탈출, 전쟁이 끝나고 국군으로 복무를 마쳤다.
이처럼 기구한 삶을 살아온 고인은 끝내 고향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지에서 생활하다 지난 2019년 숨을 거뒀다. 제주4.3희생자로 결정된 건 5년여 뒤인 2024년 11월이다.
고인에 이어 아들인 김씨 역시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해외 출장을 나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는데 발급이 거절된 것. 보증인을 세우고서야 겨우겨우 발급받을 수 있었다. 동생 역시 대학교를 졸업하고 모 기관에 지원, 합격 통보를 받은 뒤 갑자기 취소됐다.
김씨는 “자식들이 연좌제로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아버지의 가슴이 아팠을까 생각한다. 늦었지만 아버지가 명예를 회복해 지금 계신 한라산 중턱에서 편히 쉬실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그동안 고초에 재판부로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첫 번째 집행유예 선고 이후 풀려났다가 또다시 실형을 선고받은 고초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된다”며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숨죽임, 오늘 판결이 그 억울함을 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