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보이즈가 몰고 온 ‘갓’ 열풍, 알고 보니 제주가 중심이었다?

[제주를 쓰다] ① 국가무형유산 갓일 양태장 장순자 기능보유자 역경 딛고 전국 유일 ‘갓전시관’ 운영 “자랑스러운 제주의 역사”

2025-10-06     김찬우 기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등장하는 보이그룹 '사자보이즈'. 이들이 검은 도포와 갓을 쓰고 나오면서 우리나라의 갓이 세계적으로 조명받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사진=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갈무리.

“My little soda pop” 

케이팝을 통해 귀마를 쫓고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내용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에서 등장한 그룹 사자보이즈의 노래 ‘소다팝’의 가사 중 일부다. 

케데헌이 전 세계적 인기를 끌면서 이들 그룹 역시 화제가 됐고 자연스럽게 저승사자 그룹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도포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채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우리나라 ‘갓’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인 이때 제주가 갓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주 백성을 구한 김만덕이 유통한 주요 품목 중 하나인 ‘양태’도 갓의 일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갓은 전문 기술을 가진 여러 사람이 각자 맡은 부분을 제작한 뒤 합쳐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탄생한다. 모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개월간 분업이 이뤄지는 구조다.

갓은 외형을 볼 때 크게 넓게 펼쳐져 햇빛을 가려주는 ‘양태’와 위로 솟아 머리에 직접 쓸 수 있는 ‘총모자’로 나뉜다. 여기서 갓을 만드는 일을 ‘갓일’이라고 하는데 갓일은 세 가지 작업으로 이뤄진다. ‘총모자일’과 ‘양태일’, 그리고 이들을 완성품으로 만드는 ‘입자일’이다.

[제주의소리]는 추석을 맞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전국 유일 ‘갓전시관’을 지어 운영 중인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 장순자(85) 선생과 그 뒤를 잇고 있는 기능이수자 딸 양금미(49)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갓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는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장) 기능보유자 장순자 선생과 딸이자 이수자인 양금미 씨. ⓒ제주의소리
대나무 실로 양태를 짜고 있는 장 선생. 양태 짜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또 재료를 준비하는 일에만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한다. ⓒ제주의소리

# 제주가 ‘갓’의 중심지인 이유…“제주 갓은 매미날개보다 엷고”

좌의정 이복원이 아뢰기를 (중략) 해당 도백의 소원에 따라 양·곽을 나누어주고 [양은 대를 짜서 말린 것인데 곧 절풍건의 본질로서 풍속에서는 양대(凉臺, 양태)라 부르고 곽은 해곽(海藿, 미역)을 말한다. 두 물건은 모두 제주에서 나는 것이 좋다.] (후략)
-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0월 5일(1786년) -

제주의 양태는 나라가 인정할 정도로 빼어난 상품으로 인정받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는 “제주의 갓은 매미날개보다 엷고”라는 표현으로 극찬하기도 했다. ‘모자의 나라’로 불린 조선에서도 관모 생산의 중심지였던 제주다. 

제주에서 갓 만들기가 활발했던 건 양태의 재료인 대나무(양죽)과 총모자의 주재료인 말총이 생산됐기 때문이다. 특히 섬세한 손기술이 빼어났던 제주의 여성들은 대대로 갓일을 배우며 갓을 만들어냈다. 

1925년 당시 도내에서 양태를 만들던 집만 1만3000호가 넘고 연간 생산량만 12만5000개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에서는 주로 삼양과 화북, 신촌, 와흘 등에서 만들어졌고 보유자인 장순자 선생은 지금의 도련2동인 ‘면촌’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양태를 짜왔다. 

장 선생은 외할머니인 고(故) 강군일 여사(1883년~1952년)와 초대 국가 지정 국가무형유산인 어머니 故 고정생 보유자(1907년~1992년)를 이어 양태를 짜고 있다. 여기에 딸인 양금미 이수자가 4대째 갓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제주의 역사다. 

어릴 때 어머니 어깨 너머 양태 작업을 봐온 장순자 선생이 양태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성인이 돼서다. 그전까지 양태장들에게 대나무를 공급하다 남은 시간에 양태를 짰었다. 이후 어머니가 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뒤 대를 잇게 됐다.

모자의 나라 조선. 가장 가운데가 옥로립(박쥐문양 갓)이다. 가장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자관, 사립, 백립, 포립, 전립, 포립, 주립, 사립이다. ⓒ제주의소리
갓전시관에 전시된 태극양태. ⓒ제주의소리

# 호롱불로 지켜온 갓의 역사, 4대를 이은 제주의 양태

조선시대 양태를 제작하는 장인들은 여성이 많았다. 특히나 섬세하고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제주 여성들은 고품질 양태를 만들어냈고 장 선생과 양씨는 그 기술을 이어가고 있다. 

장 선생은 아직도 어머니 고 여사가 하던 작업 방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양태를 짜는 판만 겨우 보일 정도의 빛을 내는 호롱불을 켜고 밤낮으로 양태를 짜던 당신의 모습이다. 

장 선생은 “배급받은 석유를 참치캔 같은 데 부은 뒤 무명천을 꼬아 심지를 만들어 넣고 양태판에 올린 뒤 밤낮으로 양태를 짰다”며 “어머니는 다른 집에 배급된 석유를 사와 양태 짜는데 썼다. 한 달에 맥주병으로 4~5병은 사용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불을 켜면 양태판만 겨우 보일 정도였는데 석유가 다 닳으면 어머니는 ‘고팡에 강 새지름병 가져오라’고 하셨다. 누가 가져갈 까봐 고팡 문 뒤에 감춰둔 기름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어머니의 맥을 이어가지 않으면 우리나라 갓의 역사가 없어질 위기였고 또 기계로 찍어 나오는 것들을 보고 자존심도 상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양태 짜는 일에 힘을 쏟았다고 했다.

딸인 양금미 씨는 “나는 세 딸 중 가장 어릴 때부터 양태일을 하기 싫어했고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며 “그런데 갈수록 어머니 나이가 들어가는 게 보이는데 갓전시관까지 짓고 계시니 기술을 이어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장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할 나이에 모든 것을 정리한 그는 문화유산을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실력이 늘지 않는 자괴감으로 조바심이 났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일을 이어가고 이 공간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며 부담을 덜고 양태 짜는 일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위쪽 가운데 둥근 원판이 양태판, 아래 받침이 텅애구덕이다. 그 앞으로 늘어진 도구는 왼쪽부터 고칫대, 바농대, 대칼, 지들쇠, 대오리(죽사), 살대다.ⓒ제주의소리
양금미 이수자가 대오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칼. 고된 작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제주의소리

# 갓 제작 중심지 제주, 역사를 잇기 위한 ‘갓전시관’

장 선생은 “제주에 뿌리를 둔 갓의 역사를 이어가고 싶어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갓전시관을 짓게 됐다”며 “갓 관련 유물들을 모으고 갓 만드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구덕장에게 양태 구덕을 한 50개나 주문했다”고 말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청에 찾아간 그였지만, 당시에는 갓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을 직접 찾아가 예산을 받아왔고 땅을 마련하라는 요구에 맞춰 교래리 땅을 사 지금의 갓전시관을 지었다.

장 선생은 “갓전시관을 만들려고 엄청 고생했다. 그러나 죽더라도 제주의 역사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컸다”며 “양태가 제주에서 나왔는데 내가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양씨 역시 “어머니가 갓전시관을 짓지 않았더라면 육지에서 지었을 거고 그럼 제주에는 갓의 역사를 이어갈 수 없게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피력했다. 갓일 관련 국가무형유산 보유자가 가장 많은 제주에 갓전시관이 있는 건 당연하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양씨는 “갓이 우리나라 문화이긴 하지만 사실상 제주도에만 남아있다. 나라에서는 관모공예를 중요한 자원으로 보고 엄청 홍보하고 하는데 정작 제주도는 관심 없이 놔두는 게 좀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지역에서 이를 활용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텐데 개인의 노력으로만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고 제주에서 전승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장 선생도 “갓전시관을 짓고 운영하며 많은 부채를 가지고 있는데 편안하게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전시관에 관심을 갖고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며 “제주의 뿌리를 남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갓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양태와 총모자, 갓끈으로 완성된 우리나라의 갓. 양태의 곡선이 아름답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조천읍 갓전시관 전경. ⓒ제주의소리

# 케데헌 열풍 속 ‘갓’의 인기 “말도 못하게 기뻐”

갓의 인기에 대해 장순자 선생은 자신의 꿈이 이뤄진 기분이라며 “너무 자랑스럽고 말도 못하게 기쁘다”고 했다. 그는 “3명이 모자 하나를 만든다는 건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라며 “갓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우리나라의 위상도 더 높아진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기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갓을 만드는 과정은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난한 과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태 재료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 실(죽사)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만만찮다. 양잿물이 담긴 가마솥에 분죽을 넣고 졸이듯 삶아야 한다. 

이후 차가워 질때까지 식힌 뒤 그늘에서 40일가량 말려야 1차 작업이 끝난다. 그리고 대나무를 쪼갠 뒤 칼로 긁어내 실을 뽑아내야 한다.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양태 재료인 ‘대오리’를 겨우 만드는 것이다. 그다음이 양태를 짜는 일이다. 

장 선생은 “죽사도 얇기가 모두 다르게 해서 양태를 짤 때 이용한다. 보기엔 다 같은 굵기 같지만 양태는 안쪽이 얇고 바깥쪽은 상대적으로 두껍다. 양태가 노랄수록 대나무를 잘 삶았다는 것”이라고 과정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재료를 만드는 데만 수개월이고 피죽을 벗기는 일만 해도 어깨부터 팔다리 모든 곳이 쑤신다. 아무나 못할 정도로 힘든 일”이라며 “그래서 누군가는 죽사를 받아쓰기도 하는데 어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만드셨고 나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했다.

양씨는 “갓을 만들기 위해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 겉보기엔 단조로울 수 있지만, 갓 하나를 만들기 위해 성실함과 끈기, 그리고 섬세한 과정이 녹아있다”며 그런 정신이 들어있는 게 갓이다. 우리 민족의 성실성과 끈기, 충효의 정신이 깃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