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없이 갓 못 쓴다?…말총공예 본고장 제주의 ‘망건’과 ‘탕건’
[제주를 쓰다] ② 국가무형유산 망건장-탕건장 보유자 제주가 ‘유일’ 망건장 강전향·전영인 보유자,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김선이 이수자
“예전 같은 추석 명절이면 집안 어르신 모두 쓰고 계셨죠. 다들 그러셨을 겁니다.”
그만큼 당연하게 쓰고 있었던 존재였다.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갓’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착용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갓은 알아도 ‘이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 주인공은 갓에 앞서 꼭 착용해야만 하는 ‘망건’과 ‘탕건’이다. 망건은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을 간추리기 위해 이마 위에 두른 띠, 탕건은 보통 갓을 받쳐 쓰기 위해 착용하는 모자다.
망건과 탕건을 일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돼 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들 모두 제주가 중심이다. 그러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전승취약종목’으로 선정, 단절 위기에 처해있다.
모두의 관심은 물론 말총공예 본고장 제주의 관심이 더욱 절실한 지금, 추석을 맞아 [제주의소리]가 망건장 강전향·전영인 보유자와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 김선이 이수자를 만났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 모두 모녀(母女) 관계다. 어떻게 망건, 탕건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으니 마치 짠 것처럼 똑같이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일을 당연히 하는 건 줄 알았다.”
# 낮엔 망건, 밤엔 숙제 ‘주망야독’…대를 이은 전국 유일 ‘망건장’
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인 강전향(82) 선생은 집안 대대로 ‘망건’을 짜온 집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망건을 짜왔다. 낮에는 망건을 짜고 밤에는 학교 공부를 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인 고(故) 이수여 선생은 열세 살부터 망건을 만들어 온 장인으로 마지막 남은 망건장 기능보유자가 별세한 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망건을 제작할 수 있었던 장인이었다. 무형유산 지정을 위해 국가가 제주도까지 조사해 겨우 찾아낸 장인이었던 것.
강전향 보유자는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어릴 때부터 일을 배워왔다. 어깨너머 망건 제작 기술을 배우고 탕건도 짰다. “예전엔 수요가 있는 탕건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낮에 밭에 가며 탕건 만들기 숙제를 냈다. 그래서 낮에는 망건을 만들고 밤에는 학교 숙제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땐 생계를 잇기 위해 망건 대신 탕건을 만들었던 때다. 그래서 탕건을 만들었고 심부름으로 시장에 나가 육지로 물건을 떼가는 중간상인에게 팔아 돈을 받고 질 좋은 말총을 사서 돌아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어릴 때부터 탕건을 짜며 말총을 다루는 데 익숙했던 그는 어머니가 1987년 망건장 기능보유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 망건을 짜기 시작했다. 제주4.3 이후 유일한 혈육이었던 그는 2009년 기능보유자에 지정되며 망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수여 선생의 기술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평생을 반복해 숙달한 기능의 완성도 역시 비교 대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를 이은 강 보유자 역시 마찬가지다. 또 대를 잇고 있는 딸 전영인(56) 보유자 역시다. 모녀로 전승되는 우리나라 역사다.
전영인 보유자에게 어떻게 망건 일을 하게 됐냐고 물으니 “망건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히 모두가 망건을 만들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고 어깨 너머 익힌 기술들은 고스란히 실력이 됐고 대를 잇겠다는 자부심이 됐다.
전 보유자는 “20대 때 전수 장학생과 이수자로 이름을 올려 많이 고민했다. 오래 앉아 집중해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며 “그런데 어머니를 도우며 조금씩 전수를 생각하게 됐고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뜻을 가졌다”고 말했다. 망건 하나를 만드는 데는 2~3개월이 걸린다.
이어 “제주가 망건을 비롯해 탕건과 총모자 등 말총공예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건 제주 여성 특유의 강인함과 부지런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외할머니(이수여 선생) 역시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동네 여성들과 호롱불을 켜고 망건을 짰다고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제주의 거친 땅을 일구고 밤에는 노동과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며 망건을 짰다고 하니 힘든 일상이었을 것”이라며 “그런 꾸준함과 성실함, 강인함이 있었기에 망건 짜는 기술을 잊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 세계적 관심 높아진 우리 ‘갓’…“알려져 기뻐, 홍보도 노력할 것”
세계적으로 갓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 관련해 전 보유자는 “갓 관련 전통공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기쁘고 자부심이 생긴다”며 “다만 아직 이 멋진 갓을 쓰기 위해 망건이 꼭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많아 아쉽다. 저희 노력이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망건의 전통 기술 도구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 주는 게 가장 큰 의무”라며 “그러기 위해 누군가 망건을 계속 해야 하는데 능력 있고 진심으로 망건을 이어갈 전승자를 발굴, 기술을 전승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시, 시연, 교육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망건을 알릴 계획이다. 또 개인적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제게 이르기까지 망건의 기록을 정리하고 한자리에서 보여드리고 싶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무형유산 탕건장 기능보유자인 김혜정(79) 선생도 “진짜 너무 감사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에 열린 상주 세계모자페스티벌에 초대받아 다녀왔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고 관심을 많이 가져주셔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 활짝 웃었다.
탕건 일을 전수받은 기능이수자 김선이(43) 씨는 “제주에서는 탕건을 보면 ‘예전에 만들던 건데’라거나 ‘나도 할 줄 아는데’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지인의 집에서 도구가 종종 보이기도 한다”며 “그런데 육지에서는 ‘옛날 할아버지가 쓴 건데’같은 반응이 나온다”고 했다.
# 갓 대신 쓰거나 받쳐 쓴 탕건, 놀부가 쓴 ‘정자관’도 탕건
탕건은 갓을 쓰기 위해 받쳐 쓰는 모자다. 평상시 갓 없이 탕건만 쓰기도 했고 흥부전의 놀부가 쓰고 나온 모자인 ‘정자관’도 탕건의 일종이다. 그만큼 탕건은 우리네 삶에 빠지지 않았던 생활 필수품인 셈이었다.
그러나 망건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단발령 이후 상투를 틀 일이 없게 되고 갓을 쓰지 않게 되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탕건은 최고의 재료가 있었던 제주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조천읍, 화북동, 삼양동 등에 몰려있던 ‘탕건청’이 중심을 이뤘다고 한다.
앞서 김선이 이수자가 말한 것처럼 탕건을 본 시민들의 반응은 육지와 갈렸다. 제주는 ‘제작’ 경험이 주를 이뤘고 타 지역은 ‘착용’ 경험이 중심이었다. 이 같은 반응만 보더라도 제주가 탕건 제작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추론해볼 수 있다.
김혜정 보유자의 집안은 대대로 탕건을 짜왔다. 어머니인 고(故) 김공춘 여사 역시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였다. 김 보유자는 어머니의 솜씨를 물려받아 탕건을 짜고 있는데 1960년대 초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탕건을 접한 건 한국전쟁쯤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마실 나가면 몰래 앉아서 탕건을 만져보고 말총이나 바늘에도 손을 대봤다. 그러나 열일곱 살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며 “말들이 많았어서 그런지 우리 동네(삼양)나 화북, 조천 신흥 등에서 많이 만들었고 모두 오일장에 나가 팔았다”고 기억했다.
김선이 이수자는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탕건을 짰던 것 같다”면서 “어릴 때부터 장난감처럼 만지고 놀고 어머니, 할머니가 매일 만드는 걸 옆에서 봤으니까 친숙했다. 그냥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는 탕건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전승취약종목의 어려움…관심 있어야 ‘명맥’도 이어진다
갓 제작 중심지 제주, 그러나 정작 갓과 망건, 탕건에 대한 관심은 타지역보다 덜한 것이 현실이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검고 윤기 있는 말총으로 만든 새카만 탕건은 실제로 보면 정성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하나 만드는 데 3~4개월이 걸리는 정성이다.
그러나 탕건은 수요가 줄고 관심이 떨어지면서 맥이 끊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지역의 관심이지만, 마치 ‘동넷심방 안 알아준다’는 속담처럼 제주는 조용하다. 김 이수자는 “전승취약종목에 관심이 더 생기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했다.
현재 탕건장 보유자와 이수자는 김혜정 선생과 김선이 씨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갓일이나 망건장 역시 전승취약종목이며 이들 무형유산도 상황은 비슷하다. 김혜정 보유자는 “그래도 종종 관심있는 분들이 있어 참 좋다. 옛날 생각에 눈물 난다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김 이수자는 “관심이 적다는 건 그만큼 수요가 없다는 건데 그래서 아무리 시간을 할애해 만들어도 이걸로 먹고 살 수는 없다”며 “그래서 여기에 치중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 같다.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점점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예전에 추석이었으면 분명 어른들 다 쓰고 있었을 것”이라며 “그냥 잊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이런 기억들을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갓일 중 총모자는 1세대 갓일 보유자인 오송죽 선생에 이어 김인 선생, 그리고 현재 그의 딸인 강순자 선생이 이어받아 국가무형유산 갓일 보유자로 활발한 전승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