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아닌 나일의 문명”…애굽민수, 제주대서 ‘이집트학의 세계’ 강연
[2025 JDC 대학생아카데미]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 “이집트학은 과거의 CSI…과학과 인문이 만나는 융합 학문”
“이집트 문명은 사막이 아니라 나일의 초록 띠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주최하고 제주의소리와 제주대학교가 공동 주관한 2025학년도 ‘JDC 대학생아카데미’ 아홉 번째 강연이 12일 오후 2시 제주대학교 공과대학 3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무대에 오른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은 ‘이집트학으로의 초대: 고대 이집트에 관한 융합적 학문’을 주제로, 인문학과 과학이 교차하는 이집트학의 세계를 풀어냈다.
곽 소장은 한양대 문화인류학을 졸업하고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고고학 석사, 옥스퍼드·더럼대에서 이집트학을 연구한 한국의 대표적 이집트 전문가다. 다양한 방송 매체에 출연하며 ‘애굽민수’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어린 시절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카이로에서 5년간 거주한 경험이 그를 이 길로 이끌었다.
그는 이날 “이집트학은 단순히 옛 문화를 해석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과 물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학적 연구”라고 설명했다.
곽 소장은 강연을 지중해 위성사진으로 시작했다. 그는 “고대에는 아프리카·아시아·유럽 같은 지리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중해는 장벽이 아니라 문명을 이어준 교통망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의 동쪽 끝, 나일강을 따라 형성된 ‘초록의 띠’ 위에 자리했다. 사람들은 흔히 이집트를 ‘사막의 문명’이라 부르지만, 정확히는 ‘나일의 문명’이라는 것. 사막이 아닌 강이 문명을 낳았다는 말처럼, 그는 생명수였던 나일강이 어떻게 고대 왕국의 경계를 만들고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는지를 설명했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100년, 남북이 통일되면서 탄생했다. 그로부터 약 3000년 뒤, 기원전 30년 로마의 속주가 되기까지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다.
곽 소장은 “구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이어지는 왕조기의 이미지가 우리가 떠올리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미라와 같은 상징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된 4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고대 이집트 문화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곽 소장은 “고대 이집트에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림은 개인의 감정이 아닌 규칙에 따라 그려진 상징 체계였다. 우리가 그것을 ‘미술’로 부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된 법률 문서, 신전의 벽화, 왕들의 비문은 모두 문자와 그림이 함께 작동하는 기록체계였다. 이집트 문자는 신성문자(히에로글리프)와 이를 필기용으로 단순화한 히에라틱으로 나뉘는데, 그는 “기록물의 대부분은 파피루스 위에 히에라틱으로 적혀 있다”며 “입양 계약서를 보면 이미 3200년 전에도 상속 분쟁을 피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존재했다”고 소개했다.
이집트 문명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흔적인 미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 사례가 이어졌다.
그는 “건조한 기후와 나트론 소금 처리를 통한 인공 건조 덕분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며 “과거에는 붕대를 풀고 해부했지만, 오늘날은 CT와 MRI를 이용해 미라를 손상 없이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곽 소장은 고고학이 얼마나 융합적인 학문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투탕카멘 파라오의 가족 관계를 예로 들기도 했다. 피라미드 연구 역시 이집트학이 과학과 만난 대표적 사례로 소개됐다.
곽 소장은 “1990년대 이후 로봇과 물리학, 공학이 투입되면서 피라미드 내부의 구조가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3년 독일 로봇이 ‘왕비의 방’ 환기구 속에서 3500년간 봉인된 돌문을 발견했고, 이후 내시경 카메라로 내부를 조사하자 숫자와 표식이 새겨진 흔적이 드러났다.
이어 2017년에는 우주에서 오는 입자 ‘뮤온’을 이용한 스캔으로 대회랑 위쪽에 길이 30m의 빈 공간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시됐다. “실제 내시경 카메라로 10m가량의 복도가 확인되며, 피라미드가 여전히 비밀을 품고 있음이 증명됐다”고 그는 말했다.
최근에는 피라미드 앞까지 나일강 지류가 흘러들어왔다는 증거도 속속 나오고 있다.
곽 소장은 “피라미드 앞에서 채취한 퇴적물 속 꽃가루가 수생식물의 것이었다. 물길이 무덤 앞까지 닿아 있었다는 뜻”이라며 “라이다 지형 분석으로도 과거 수면 흔적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즉, 장례 행렬과 석재 운반을 위한 수로가 피라미드와 바로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과의 차이도 짚었다. “역사학은 기록으로 과거를 복원하지만, 고고학은 물건으로 인간을 연구한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물건은 돌찍개 같은 석기였고, 그 연대는 2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만든 330만년 전 석기도 발견됐다. 고고학은 인간의 물질적 흔적을 통해 가장 먼 과거까지 닿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설명했다.
강연의 마지막에서 곽 소장은 최근 개관한 ‘대이집트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을 직접 다녀온 소감을 전했다.
곽 소장은 “전 세계 박물관 중 물리적 완성도는 최고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출토된 5400여 점의 유물이 한 공간에서 공개된다. 연구자에게는 감동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고고학은 과거의 인간이 남긴 흔적을 통해 오늘의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며 “이집트학은 언어·문헌·미술·자연과학이 융합된 살아 있는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과거의 피라미드 연구가 돌을 세는 일에 그쳤다면, 지금은 물리학자와 로봇공학자가 함께 돌 속의 시간을 여는 시대”라며 “학문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협력의 지혜가 문명을 밝힌다”고 말했다.
JDC 대학생아카데미는 <제주의소리TV>를 통해 생중계되며, 강연이 끝난 후에는 VOD 서비스도 제공돼 언제 어디서나 강의를 시청할 수 있다.
*JDC대학생아카데미 기획취재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지원과 협조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