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어느 순간인들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있었겠는가마는,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어서 더 아름다웠던 순간은 금새 지나가버렸다. 내 줄 것 다 내준 빈 몸으로 바람이 되어 서 있는 나무. 노랗게 잘 익은 귤을 가득 담고 불끈 불끈 근육을 자랑하던 남자의 얼굴에도 땀방울을 맺게 하던 귤 상자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가위질 소리와 일하는 아낙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잘려나간 탯줄처럼 하얀 끈들이 대롱거리고 있다. 목청 높던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찰랑찰...
(44) 그리운 별꽃 별꽃이 피었다. 과수원 한쪽, 무리를 이룬 초록의 잡초들 사이 하얀 점들이 찍혀 있다. 서서 볼 땐 하얀색 점이지만 허리를 약간 숙이면 그 점은 작은 우주와 같은 꽃잎으로 제 정체를 드러낸다. 허리를 굽히고 예의를 갖추어야 비로소 제 얼굴을 보이는 꽃이다. 지나는 시선들을 잡아끄는 화려한 색깔도, 커다란 몸집도 없지만, 작으면 작을수록 제 안의 힘을 믿으며 자존심을 잃지 않는 꽃 송이들. 초록 이파리를 발판 삼아 줄기를 만들고 그 줄기 끝마다 하얀 꽃을 피웠다. 아직 고집스럽게...
(43) 선물의 의미 설 명절이 가까워지면서 한라봉 주문량이 많아졌다. 설 명절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보내기 위함이다. 주문의 대부분은 설 명절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고, 그러기 위한 마지막 날짜를 택배 회사에서는 제시하고 있었다. 물건을 준비해서 보내는 농부들이나, 운송을 책임지는 택배회사나 설이 가까워질수록 전쟁같은 시간들이 이어졌다. 농산자와 소비자간 직접 유통은 생각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뤄져서 하루 종일 택배회사 주차장에는 농민들의 차량이 들어오고 나갔다. 깔끔하고 예쁘게 포장된 ...
(42)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 한라봉 열다섯 개가 한 상자 안에 담겼다. 노란 속지에 싸인 노란 과일 색깔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찬란한 아름다움. 눈부심을 덜어내려는 듯 꼭지 마다 매달린 초록색 이파리가 눈가의 주름살을 풀어준다. 완벽한 조화다. 내가 만들어놓고도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해 가만히 들여다보다 마지막으로 비닐 포장을 덮었다. 이제 이 과일은 내 손을 떠나 소비자에게 갈 것이다. 다 키운 딸을 시집보내듯, 자꾸 상자에 손이 간다. 흠집이 있는 것은 골라내고 크기도 일정하게 골라냈고...
(41) 까마귀의 고향 까마귀. 전선을 꽉 채운 까마귀들이 점선처럼, 음표처럼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교래 사거리. 땅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어둠이 자동차의 불빛을 피하며 하늘과 맞닿으려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는 시간.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인가. 어깨를 나란히 맞춘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까마귀. ‘방향을 가진 것들은 무서운 힘이 있다’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일제히 북쪽을 향해 머리 쳐든 모습에서 느껴지는 저 힘은 무엇인가. 간절함 같은 것, 혹은 ...
(40) 해가 저문다는 것 해가 저문다. 동그랗게 제 실루엣을 드러낸 태양이 나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있다. 순하디 순한 얼굴로 이제까지의 제 노고를 알아달라는 듯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은 그 힘이 쇠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눈을 들어 올려다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한낮의 절대 권력은 어디에도 없다. 느슨해진 태양의 손아귀에서 눈치껏 빠져나온 만물의 색깔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무와 바다와 하늘의 색깔이 애초 검은 색에서 나왔듯 태양의 손아귀를 벗어난 색깔들이 ...
(39) 금잔옥대에 술 한 잔 수선화 피어있다. 옥색 받침에 금색 잔 모양의 이중 꽃이 돌담 아래서 군락을 이루었다. 화려했던 단풍은 짧은 가을만큼 서둘러 떨어지고, 어디를 둘러봐도 상실과 결핍의 허기만 가득한, 감출 수도, 감출 것도 없는, 본색이 다 드러나는 겨울. 확인되지 않았을 때 가지는 실낱같은 희망도 이 겨울에는 바닥을 내보이는데, 어쩌자고 수선화 저 홀로 피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인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 돌담 아래서 그들의 무리는 긴 행렬을 이룬...
(38) 좋은 품질을 위하여 스프링클러 꼭지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져 나온다. 스위치 하나 올렸을 뿐인데 과수원 입구에 있는 물통의 물이 스프링클러를 통해 하우스 안에 일제히 뿌려지는 것이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늘 신기하고 재미있다. 물이 한 곳으로만 집중되지 않도록 스프링클러 꼭지가 좌우로 반복하여 움직이면서 물을 골고루 뿌려댄다. 흙 위의 마른 낙엽과 지푸라기들이 오소소 소리를 내며 물을 받아든다. 차가움에 놀란 듯, 목마름에 반가운 듯. 움찔 움찔 몸을 일으키던 지상의 마른 것들이 몇 방울의...
(37)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규격’ 하늘이 맑다. 이제는 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가을 하늘. 12월 초순을 넘기고 있는 시점의 하늘에서 가을을 논한다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오늘 날씨는 시간을 약간 뒤로 돌려도 될 것 같다. 햇살은 눈부시고 하늘은 파란색 바탕에 뭉게구름 몇 점 한가하게 떠 있다. 한 손에 가위를 들고, 다른 한손은 귤을 찾아 고개를 들었건만 귤보다 먼저 하늘이 내 망막에 들어와 앉는다. 이물질에 가려지지 않은 순수 민낯의 하늘. 어느 시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손톱으로 툭 튕...
(36) 열풍기를 설치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집채만한 기계가 설치되었다. 복잡한 전기회로가 있는 판넬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모터 같은 것도 달렸다. 열풍기다. 말 그대로 뜨거운 바람을 만들어 하우스 안의 온도를 올려주는 기계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말로만 들었던 것의 실체가 눈앞에 있다. 생각보다 크다. 나뭇가지 사이에 비집고 들어앉아도 괜찮은가 하는 걱정이 든다. 기계가 뜨거워지면서 주변 나무들을 태워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바람이 뜨거운 것이지 기계가 뜨거워지는 건 아니라며 괜찮...
(35) 가지를 잘라내다 충직하게 자란 가지들을 다 잘라냈다. 내 팔 길이만큼, 손가락 길이만큼, 늘씬하고 영양스럽게 자란 것들이다. 더러 병충해 때문에 잎사귀들이 뒤틀린 것도 있지만 대체로 보기가 좋다. 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서도 힘이 남아 있는 나무들은 새순을 올렸다. 잉여의 에너지를 한순간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취한 만큼 내어놓는 자연의 법칙이다. 여름 순이 적당하게 있어야 다음 해 해거리 현상이 없다고 했다. 열매가 적당하다는 뜻이므...
(34) 노단새미 이야기 “여보세요. 농부님, 저기 저 샘물을 떠다 나무 아래 좀 숨겨주세요.” 밭을 가는 농부에게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을 하는 처녀. “그러지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 심드렁하게 말을 받은 농부, 마침 점심을 먹고 난 빈 그릇에 물을 떠온 농부는 나무 아래 놓아둔 소질메 속으로 물그릇을 숨겼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밭을 갈았다. 그런 농부 등 뒤에서 홀연히 물그릇 속으로 사라지는 처녀. 그리고 잠시 후, 행색이 남다른 사내가 나타나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아 이리저리 ...
(33) 옛 이름과 새로운 이름 사이 귤나무 두어 그루 완전히 말라 죽어 있다. 표정을 잃은 채 굳어있는 가지들은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승의 개념에서 벗어난 것들의 무념무상이다. 작년에 내렸던 폭설 당시 몸에 얼음이 박혔던 나무들이다. 하루 만에 몸에 박힌 얼음은 풀어졌지만 그 후유증은 결국 나무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혹시 모른다. 주인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었다면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모습으로 서 있지 않았을지도 말이다. 동사된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두둑히 짚을 깔아 수분 증발을 ...
(32) 또, 비! 비 온다. 귤나무 이파리들이 빗방울의 무게에 휘청 뒤로 물러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뭇잎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 목덜미에 떨어지는 서늘한 감촉, 언뜻언뜻 내 코끝에 와 닿는 물비린내. 보이지 않아도 비의 존재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귤을 따내는 가위를 놓지 못한다. 하나라도 더 따야지. 바람도 없이 고요하던 나뭇잎들이 소란스럽다. 그 소란스러움을 수직으로 내리꽂으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란스러움과 빗방울의 수치가 정비례의 직선을 그으며 상승한다. 이파리와 열매마다 물방울이 맺...
(31) 여름을 치열하게 보낸 열매들 진초록이던 한라봉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던 햇살을 받아내기 위해 극에 달했던 진초록이었다. 8월의 하우스 안은 햇살과 나무의 한판 싸움이 날마다 치열하게 이어졌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에너지들을 동원해 싸웠다. 8월의 절대 권력인 태양을 상대하기 위해 나무는 진초록이 검게 변할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내뿜었고, 태양도 쉴 새 없이 열기를 내리 쏘았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는 나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30) 7월과 8월 불살라버린 열여덞명의 아줌마들 불꽃을 품었다 해서 혼자 탈 수는 없는 것, 2016년 그 무더웠던 7월과 8월을 멋지게 불살라버린 열여덟명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최고참 61세, 막내 27세,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사람들끼리 한 방에 모여 공부를 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주 5일. 농수축산물 홈페이지 제작과정을 듣기 위해 제주시는 물론, 서귀포시, 표선 등지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들이 참여를 했다. 평소 카카오톡이나 밴드 정도 쓰고 볼 수 있으면 족하던 사람들...
(29) 쪽파 단상 남들 보다 일찍 찾아온 노안도 이쯤이면 거뜬히 이겨낼 것 같다.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것들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력이다. 그 시력이 제 빛깔을 분명히 하고 있는 쪽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된 듯하다. 모든 게 불분명하고 흐릿한 것들이지 않는가. 저렇게 제 색깔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검은 흙 위에 이제 막 싹을 올린 초록 이파리가 미끈하다. 선명한 초록빛은 내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들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찡그려 있던 눈자위가 편안...
(28) 태풍이 지나고 난 뒤 어둠은 공포를 더 짙게 했다. 깜박깜박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전기와 그칠 것 없이 몰아치는 유리창의 빗소리, 그 빗소리마저 다 훑고 가겠다는 듯 힘을 과시하던 바람.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들의 소리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공포를 가중시키고, 12층 아파트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린다!’ 느꼈을 때 공포는 극에 달했다. 세상이 끝나는 여러 영화의 장면을 생각하다 깜박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흔들흔들,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면,...
(27) 그물망으로 해바라기를 감싸며 키 큰 해바라기 하나 우뚝 서 있다. 과수원 입구 길가, 작년에 심었던 해바라기 씨를 거두었다가 올봄 다시 뿌린 곳이다. 내심 작년보다 더 풍성한 결실을 기대 했었는데, 달랑 이거 하나 남았다. 다른 게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풀숲에 묻혀 있다가 어느 순간 빈 쭉정이만 남아 있었다. 관심을 덜 준 탓이리라. 저 혼자 나고 자라서 크고 고운 꽃을 피우더니 빈틈없이 씨앗을 품었다. 어느 일류 기하학자가 그리더라도 따라오지 못할 완벽한 나선형을 ...
(26) 의무를 다한 것들의 표정 열매 묶기가 완료되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간의 여유는 있을 줄 알았다. 가끔 약이나 치고, 가끔 풀이나 뽑고, 그 정도.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많다. 하우스 위 물홈을 청소하고, 부식이 되거나 녹이 슨 철제들을 찾아다니며 방청제를 바르고, 헐거워진 부분들을 다시 고정시키고... 봄부터 한여름까지 내부 일을 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비닐하우스 자체를 돌봐야 할 시기인 것이다. 태풍에 대비도 할 겸, 여름 온도를 맞추기도 할 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