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30) 보름 남짓한 중국횡단기를 마치면서 골목을 걸어 나와서 모퉁이에 작은 커피점이 있어서 들어갔다. 아담하고 예쁘게 꾸며진 실내가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 카펜터스의 낯익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라떼 커피를 한 잔 시켰는데 하얀 크림으로 나뭇잎을 띄워놓아 더욱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When I was young, I’d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9) 공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주변의 소공원에 이름만 붙였을 뿐 라오서 흉상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공원 끝까지 걸어가자 왠지 낯익어 보였는데 그 끝에 나 있는 도로가 칭다오에 도착한 첫날 칭다오역을 거쳐 천주교회를 돌아 나온 바로 그 길이었다. 그때는 뒤쪽에 있어서 이곳이 라오서 공원인 줄을 몰랐던 것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8) 여행 첫 밤을 보냈던 꽌샹산꽁위엔으로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지난을 거쳐 칭다오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가 넘어서 도시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내로 들어와서 사람들이 내리는 걸 보고 따라 내렸는데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근처에 세워져 있는 택시에 다가가서 말했다.“꽌샹산꽁위엔!&rd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7) 孔子(콩쯔), 包子(바오쯔), 祥子(샹쯔)어제 이불 속에 들어간 그대로 나왔다.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을 손으로 떼고 거울을 보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갈무리하고 방을 나섰다. 가게에서 생수를 한 병 사면서 길 건너편의 버스터미널 위치를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갔다.옌저우에서 취푸까지는 버스로 30분 거리인데 버스를 타고 잠깐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6) 옌저우로 가는 기차 안에서기차는 깨끗하고 쾌적했다. 전에 탔던 기차와는 다른 고급스런 분위기에 승객도 붐비지 않고 빈 좌석이 많아 여유가 있었다. 아마 등급이 다른 고급열차인 모양이다. 기차 내의 매점에서 산 커피 한잔과 비스킷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몇 군데 중간 역을 거치고 한적한 농촌 풍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우창역에서 산 기차표, 출발은 한커우역에서기차역까지 멀지 않은 것 같아서 정류장과 좀 떨어져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승용차들이 다가와 서 어디 가느냐고 묻고는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얼마 후엔 검정색 고급 승용차가 다가와 내 앞에 멈추더니 긴 생머리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매력적인 여성이 나를 보면서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4) 양악루와 황학루를 따라 쑨원기념관까지동팅후(洞庭湖, 동정호)를 중심으로 북쪽이 후베이성(湖北省), 남쪽이 후난성(湖南省)인데 후난성의 성도는 창사이고 후베이성의 성도는 우한이다. 우한은 우한삼진(武漢三鎭)으로 일컬어지던 우창 한커우 그리고 한양의 세 도시를 묶어서 하나의 도시를 만든 것이다. 한커우는 장강(長江)의 북쪽에,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3) 혼탁한 시대 버티다 끝내 목숨 끊은 시인 굴원생가와 조금 떨어져 웅장한 모습의 마오 동상이 서 있었다. 거기에도 생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마오에 대한 헌화와 참배를 하고 있었다. 단체로 방문한 사람들은 장엄한 음악을 틀어놓고 다양한 추모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은 여전히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중국의 국부로서 경외와 흠모의 정이 각별함을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꿈결인 듯 정신이 혼미한 중에 차창 밖의 어둠이 걷혀가고 버스가 속도를 줄여가며 멈춰선다. 휴게소인가 싶어 화장실이라도 갔다 와야겠다생각하고 침대에서 통로로 내려서는데, 옆자리의 사내가 창사에 도착했으니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깨이며, 그때서야허둥지둥 꺼내놓았던 책이며 손전등, 수첩 등을 배낭 속에 쑤셔 넣고,
[초짜여행가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1) 어제 맥주도 좀 마시고, 많이 걸었던 탓에 피곤했는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리모콘으로 TV를 켜니 중국CCTV의 뉴스가 나오고 있다. 아나운서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지만 밑에 중국어 자막이 있어서 대충 알 수 있었다. 배추를 비롯한 채솟값 폭락이 주요뉴스였다. 중국에 온 첫날 칭다오에서 본 신문에서도 배춧값 폭락이 주요뉴스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0 충칭 시내 한 바퀴가볍게 숙소 주변 시내모습을 구경할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얼마안가 큰길 옆 골목길 계단에 몇몇 사람이 좌판을 벌여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 좌판이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 사방으로 뻗어 있는 좁은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9 충칭에서의 하룻밤19세기까지 충칭은 인구 이삼십만의 중소규모 도시였으나 중일 전쟁 당시 난징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이곳을 임시수도로 정하여 옮겨오면서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3,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사는 중국 최대의 도시로 탈바꿈하였다.충칭은 장강(長江)과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지점의 반도처럼 튀어나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8 두보초당과 청양궁두보(杜甫)는 하급관리직으로 잠시 관직에 머물기도 했지만 거의 평생을 실의와 좌절 속에서 방랑 생활을 하며 궁핍하게 지냈다. 본래 하남성(河南省) 양양(襄陽)에서 출생한 두보가 성도(成都)에서 생활한 것은 759년에서 763년, 그의 나이 49세에서 51세까지 3년가량이다. 참혹한 안록산의 난을 겪고 난 후 중원
17 이백과 두보가 살던 파촉(巴蜀)으로 파촉(巴蜀)의 땅, 이백과 두보의 땅쓰촨(四川)지방은 오랜 옛날부터 ‘파촉(巴蜀)’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파(巴)’와 ‘촉(蜀)’은 모두 고대 이 지방에 살던 부족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이 지방의
16 비단마을 '청뚜(成都)' 그리고 제갈공명의 사당아침 공기는 좀 서늘하고 상쾌하다. 공항 가는 셔틀버스를 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은 호텔 앞이었고, 일찍 챙겨 나온 탓에 여유로웠다. 호텔에서 버스표를 사고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이 가득 들어찬 낡은 미니버스였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든 사람들이버스
15 도교 최고의 신을 모신 사찰, 그리고 이슬람식당에서의 저녁식사너무 편하게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단숨에 올라와서 그런지 감흥이 덜한 느낌이고 나는 오히려 감기와의 악전고투로 감동을 느낄 새도 없었다. 가이드는 일행들에게 간단히 설명을 하고 나서 근처의 한 사찰로 이동하였다.‘福壽觀’이라는 도교 사원
14 티벳으로 여행떠난 청년과의 조우 그리고 천산인파 속을 걸어가 번화가 고층건물들 뒤편의 뽀얀 연기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안은 양꼬치 굽는 매캐한 연기 속에 노점상들과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잘게 잘라서 파는 수박 한 조각을 사서 먹고, 화덕에 구운 빵도 하나 샀는데, 빵
13 흉노의 땅 서역(西域) 우르무치에서새벽 한 시. 기차에 오르자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감기 몸살이 심해지는지 밤새 잠을 자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어제 목이 따갑게 아프더니 이제는 코가 막히는 것이 감기 증세가 완연했다.뿌옇게 흐린 창밖을 보니 유전지대인지 황량한 벌판에
12 상처투성이 삼륜 자동차와 류위엔 기차역시장 너머로 이슬람 사원의 돔이 보여 발걸음을 그리로 옮겨 갔다. 이슬람 사원인‘둔황칭전스’는 시장 뒤쪽의 주택가 좁은 길을 들어간 곳에 있었다. 이슬람사원의 중국식 표현이다. 사원 주변에는 이슬람 식당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슬람사원을 지나 한적한 큰길 교차
11 하마터면 여행 접고 돌아갈 뻔 했던 위기안락한 호텔 침대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잠이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이미 날이 밝았다. 아침 공기는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한데, 어제의 모래폭풍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잦아들어 조용하고, 봄바람이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채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린 학생들은 자전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