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양하꽃 봄은 바다로 올라오고 가을은 산에서 내려온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하면 어김없이 시장에 양하꽃이 나온다. 양하꽃은 가을을 알리는 산의 전령사다. 차츰차츰 아래로 내려와 추석 무렵엔 중산간 마을을 지난다. 양하는 생강과 식물로 생강과 비슷하다. 닭발처럼 생긴 뿌리를 뻗으며 사는 다년생 식물이다. 봄에는 어린순이 가느다란 죽순처럼 올라오는데 꺾어 나물로 먹는다. 섬유질이 많고 향이 독특하다. 추석 무렵엔 꽃을 먹는다. 뿌리에서 나온 꽃은 자주색 잎으로 겹겹 싸인 송이에서 노란 꽃이 수줍게 고갤...
(6) 각재기국 좀처럼 꺾일 것 같지 않던 폭염이 처서 지나 고개를 숙인다. 순리란 그런 거다. 질주하던 태양조차도 절기 앞에 주춤하는 거. 마디마디 뿌리 내리며 한창 피던 달개비도 선한 바람에 꽃을 거두는 거. 높은 곳에 걸린 깃발이 방향을 트는 바람에 끝자락을 내 주는 거. 열매 키우느라 초록이 휘는 숲에도 숨 고를 시간을 선물 하는 거. 생각보다 먼저 몸이 알고 움직이는 거. 에어컨과 냉수로 달래던 몸이 칼칼하면서 뜨끈한 각재기국을 당긴다. 각재기국은 땀을 내면서 먹어야 제 맛이다. 각재기는 전갱이를...
(5) 쉰다리 오일장에서 누룩을 샀다. 천 원에 두 개를 준다. 쉰다리를 실컷 해 먹고도 남겠다. 먹을 사람이라야 남편과 둘 뿐이니. 사실 우리 아이들은 쉰다리가 뭔지 모른다. 전기밥솥 덕에 변해서 버리는 밥도 없었고 음료도 주전부리도 널려서 굳이 쉰다리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식품광고에서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얻고 유행 따라 살았다. 호기심과 편리함에 입맛을 저당 잡히고 산거다. 우리 아이들은 제주가 고향이라면서 고향음식을 잘 모른다.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중 하나다. 식문화는 부엌에서...
(4) 보말 움직이는 대로 땀이 줄줄 쏟아진다. 이런 날 이 제주에 산다는 건 정말 신이 내린 축복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 여름의 정점에 백중사리가 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을 전후하여 일 년 중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때를 가리킨다. 소라며 보말이 살찔 때이기도 하다. 섬이 제일 커지는 그 한 때, 웃뜨르인 중산간 마을 사람들까지도 바롯잡이란 걸 하러간다. 물 빠진 돌 밑이나 바위틈에 붙어 있는 보말도 잡고 몸도 담그고. 어른들은 더 깊은 물속으...
(3) 옥수수 봄날이 꽃을 꼽는다면 여름날은 저녁시간이다. 불덩이가 서쪽 하늘에 기댈 즈음 그늘 깊게 드리우는 시간. 하늘은 더없이 온화하고 한 모금의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 달달하다. 정열의 뒤끝이 이런 맛일까. 이런 날은 단촐한 저녁을 하고 싶다. 마당에 멍석 깔고 먹는 저녁은 메뉴가 무엇이든 맛있었다. 그리고 더 맛있는 건 한 두 시간쯤 있다가 먹는 옥수수였다. 같은 옥수수라도 저녁별을 보며 먹는 옥수수는 특히 맛있다.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알이 성근 걸 뜯어 잡수시고 어머니는 작고 못생긴 것만 골라 느...
(2) 냉국 가장 제주다운 음식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냉국’이라 하겠다.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 만들기 쉽고, 단촐 하지만 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는데 이만한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기본은 나물을 손질해서 날된장으로 버무리고 냉수를 부어 간맞추면 끝이다. 불 없이도 되는 초 간단 메뉴다. 지금은 갖가지 재료와 양념이 넉넉해서 조금만 꾀를 부린다면 여름밥상은 후루룩이다. 들로 바다로 바깥활동이 주된 생활이었던 제주 사람들에게 냉국은 정말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야외음식이기도 했다. 삶은 배추, 물외, ...
(1) 호박잎국 장마가 열흘을 넘어간다. 제 세상을 만난 수국이나 능소화는 빗속에 더 고고하고 어여쁘다. 허나 다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의 텃밭 작물과 꽃들이 물에 지쳐간다. 열무처럼 잎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것도 있다. 그래서 녹음이 짙푸른 여름철에는 오히려 먹을 만한 채소가 귀하다. 이 와중에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호박 줄기가 당당하다. 장마도 가뭄도 잘 견디며 게다가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조선호박. 지인의 자동차 트렁크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텃밭에 내려놓고 간 것인데 싹을 틔웠다. 몇 개를 추려 울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