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 재판 재심 청구

왼쪽부터 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 이재훈 할아버지가 재심 청구 소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92)·이재훈(91) 할아버지. 이재훈 할아버지가 재심 청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한 생존수형인 2명이 재심 청구에 나섰다. 생존수형인의 재심청구는 이번이 세번째다.

10대 시절 느닷없이 몰아친 시대의 광풍 속에서 질기고 모진 생명을 붙잡고 살다보니 벌써 아흔을 넘긴 백발 노인들이다. 살날이 많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두 노인의 재심 청구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살아온 지난 날이 얼마나 억울하고 질곡 같은 삶이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고태삼(1929년생)·이재훈(1930년생) 할아버지와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일 오전 11시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재심청구서를 법원에 접수했다.
 
4.3 당시 본적이 제주읍 구좌면 종달리였던 고태삼 할아버지는 올해 92세다. 10대 후반이던 1947년 6월6일 있었던 종달리 6·6사건에 연루돼 단기 1년, 장기 2년 형을 선고받아 인천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6·6사건은 종달리 청년 70여명이 모여 마을 발전을 위해 논의하는 과정에 경찰이 현장에 참여하자 “경찰이 왜 왔느냐”고 항의하다 발생한 몸싸움으로 이후 총 44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고태삼 할아버지는 마을 집회가 이뤄졌던 6월6일 이후 열흘정도 집을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온 6월16일께 경찰에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다 재판을 받았다.
 

당시 내란죄 등의 혐의를 뒤집어 써 체포된 44명 중 생존자는 고태삼 할아버지가 유일하다.

2일 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가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생존수형인의 재심청구는 이번이 3번째다.
2일 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가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생존수형인의 재심청구는 이번이 3번째다.

이재훈 할아버지는 올해 91세. 이 할아버지는 중학교 시절이던 1947년 8월13일 경찰의 발포로 북촌리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은 사건 현장 인근에 있다가 체포됐다.

총소리가 난 뒤 마을 주민들이 어디론가 몰려가자 이재훈 할아버지도 따라갔고, 경찰이 “너 어디에 사느냐”고 묻자 이재훈 할아버지는 “북촌에 산다”고 답했다.
 
경찰은 곧바로 체포를 시도했지만, 당시 이재훈 할아버지가 다니던 제주중학교 선생님이 “우리 학교 학생”이라며 경찰을 설득해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다음날 이재훈 할아버지를 체포해 갖은 고문을 했다. 이재훈 할아버지는 “삐라(북한 선전물)를 봤다”고 거짓증언한 뒤 고문에서 벗어났지만, 재판에 넘겨져 단기 1년, 장기 2년을 선고받아 억울하게 옥살이 했다.
 
두 사람은 1차 재심청구를 통해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생존수형인 18명(군사재판)과 달리 일반재판에 대한 재심청구를 했다. 2차 재심청구자 8명 중 1명도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와 같은 일반재판 재심청구자다.
 
두 할아버지의 재심 개시를 위해서는 불법구금 사실과 당시 고문 사실 증명이 쟁점이다. 불법구금은 당시 영장 발부와 재판 등 절차가 적법했는지가 중요하며, 고문사실 입증을 위해서는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필요하다.
 
이재훈 할아버지는 ‘재심청구 소감’을 묻는 취재진 물음에 “너무 억울하다. 법치국가에서 당시 제주중 2학년이던 나를 매질과 물고문 등으로 새벽까지 고문했다. 고문을 너무 당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억울함을 안고 살다가 이렇게 재심을 청구하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고태삼 할아버지는 목이 메인 듯 “말이 안 나온다. 할 말이 없다”고 짧게만 답했으나, 아흔 노인의 짧은 대답 뒤로 지난 세월의 고통과 무게가 그대로 전달된다.  
 
2일 제주4.3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가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생존수형인의 재심청구는 이번이 3번째다.
아흔을 넘긴 고령의 생존수형인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가 직접 재심청구서를 접수하기 위해 2일 오전 제주지방법원을 찾았다. 

4.3도민연대는 “두 분은 영장없이 체포돼 경찰의 살인적 취조와 고문을 받은 뒤 이름만 호명하는 재판에 의해 형무소로 이송됐다. 재판기록은 판결문과 형사사건부 등이 존재하지만, 판결문 어디에서 두 사람의 범죄 사실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1947년 미군정 아래 무고한 제주의 어린 학생과 어린 소녀에게 가한 국가공권력은 명백한 국가범죄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사법정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며 4.3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4.3도민연대는 “두 할아버지는 평생의 한을 풀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사법부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명예롭게 정리할 수 있도록 조속히 진실을 규명해 72년 전 어린 소년들에게 채운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고 조속한 재심 개시를 촉구했다.
 
이번 3차까지 재심을 청구한 4.3 생존수형인은 총 28명이다. 이중 2월 현창용 할아버지, 9월 김경인 할머니, 12월 김순화 할머니, 올해 2월 송석진 할아버지까지 총 4명이 별세했다.
 
1차(18명)은 공소기각 판결을 이끌어내 배·보상 청구 소송에 들어갔으며, 2차(8명) 재심은 아직 개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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