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오스트레일리아 기록보관 문서 첫 입수
헤럴드 트리뷴 "딘,경찰과 서청이 4.3 원인" 보도

▲ 일본으로 밀입국했던 제주인들의 이름, 성별, 나이, 주소 등이 적혀 있는 문서.ⓒ제주4.3연구소 제공
제주4.3당시 일본으로 밀항했던 제주도민들의 인적사항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제주4.3연구소(소장 이규배)는 최근 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에 있는 4.3사건관련 당시 일본 밀입국자 가운데 일부 명단과 제주도 시찰기록, 당시 신문기사 등 관련 자료를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교수로부터 입수했다고 23일 밝혔다. 그동안 제주4·3과 관련한 각종  자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등에서만 발견됐으나 오스트레일리아 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6월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돌아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모리스 스즈키(Morris-Suzuki) 교수로부터 최근 입수한 문건은 모두 5건으로 그중 '1948년 10월 25일 영연방점령군 작성 문서'에는 일본 밀입국자의 인적사항과 직업, 밀입국 목적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영연방점령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인도, 뉴질랜드 등으로 구성됐으며, 주일미군이 일본의 군정을 담당한 반면, 영연방점령군은 1946년 2월 21일부터 1952년까지 일본군의 비무장화와 일본 군수산업시설의 해체 등을 감시했다.

#4.3당시 탄압피해 제주도민 281명 일본으로 밀입국한 것으로 추정

이 문서에 따르면 1948년 6~8월에 일본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카와노이시항구로 한국인들이 밀입국한 건수는 7건으로 전체 290명이며, 이들 가운데 다른 지방 출신이거나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한 제주출신자는 모두 281명으로 확인됐다.

남자는115명, 여자는75명이고, 20살미만의 10대 청소년들과 유아들도 68명으로 나타났다. 직업은 농업이 가장 많고, 학생, 노동자, 공무원 등 다양하게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한림 196명 △애월 37명 △대정 25명 △안덕 18명 △제주읍 4명 △중문 1명 △기타 9명 등이다. 이들은 4·3당시 탄압을 피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 한 것으로 판단된다.

4.3연구소가 입수한 문건에는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오스트레일리아 대표가 제주도를 시찰한 뒤 1957년 8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낸 문서도 포함됐다.

▲ ⓒ제주4.3연구소 제공
# 오스트레일리아 문서 "제주도민들은 4.3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잊지 않을 것이다"

1957년 7월 16~21일 제주를 방문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를 대리한 Ashwin이 주한 서독 총영사 Richard Hertz와 작성한 이 문건에는 "혹자는 1950년의 제주도를 제2의 대만화가 되고 있었다고 회상할 수도 있다"고 말을 꺼낸 뒤 "보다 중요한 것은 제헌의회 선거기간과 그 이후의 1948년과 1951년부터 1955년의 간헐적인 시기로, 정부가 정치소요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을 채택 하였던 것”이라며 “많은 주민들이 게릴라들을 은닉 하거나 지원해 준 혐의로 사살되었으며, 도민들은 이를 잊지 않고 있고,잊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1957년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군 규모에 대해서도 육군 180명, 해군 120명, 공군 20명, 미공군 170명이라고 상세히 적고 있다.

또 "상당히 전략적인 관심사항은 제주도가 중국 상하이로부터 270마일(에어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대륙 폭격을 위한 일본군 기지로 사용됐으며, 미군은 모슬봉에 레이다기지를 운용하고 있는데, 한반도 해안을 커버한다"면서 "미군은 이 레이다기지가 상하이 공항까지 감시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57년 현재 소 사육두수가 3만2천마리로 한국전쟁 초기에 비해 많이 불어났으나, 1948년 4.3사건 당시 수준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어선수는 450척(동력선 100척도 안됨)이라고 밝히고 있다.

# 뉴욕 헤럴드 트리뷴 "경찰이 좌익을 만들었다" 현지 신부 발언 인용

▲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기사.ⓒ제주4.3연구소 제공
이와 함께 4.3 당시를 기록한 1948년 4월 29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도 이번에 입수됐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보른 출신의 오스틴 스위니 신부와 도네갈 에이레의 패특릭 도우손 신부의 말을 인용해 " 경찰의 야만성이 4.3사건의 주요 원인이다"라고 보도했다.

콜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12, 14년 동안 살았으며, 일제에 투옥된 경험을 갖고 있는 스위니 신부는 제주도를 방문한 외신기자에게 “모든 이러한 소요의 유형이 러시아식 유형이지만, 경찰이 좌익을 만들어내고 있다"면서 "당신이 경찰에게 맞는다면, 당신은 자연히 폭도로 규정된다"는 말로 당시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폭도로 둔갑됐는지를 보여줬다.

"이들 신부들은 다른 지방에서 파견된 경찰이 일제 때 경찰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 서북출신으로 제주에 경찰들의 악행이 심각했음을 짐작케 했다.

# 딘 소장, '4.28평화협상' 다음날 경비행기로 토벌작전 시찰
 
이어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는 4월29일 딘 군정장관과 함께 제6사단장 올랜도 워드 소장이 제주도를 방문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4.3 발발직후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이 가진 이른바 '4.28평화협상' 다음날인 29일에는 딘 군정장관만이 제주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 제6사단장인 워드 소장도 함께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딘 군정장관은 외신기지에서 "경찰의 야만성과 우익정치단체의 테러가 사실상 4.3의 원인이지만 공산당이 활동하는 부분도 과소평가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보도해 딘 역시 경찰과 서청의 탄압이 4.3의 발발 원인임을 인정했음을 보여줬다.

또 딘 장군 등이 경비행기를 이용해 경비대가 마을을 포위해 18살 이상의 모든 남성들을 체포하는 산악요새를 시찰했다고 밝혀 일체의 무력행동을 중지키로 합의한 '4.28평화협상' 바로 다음날에도 토벌대의 작전은 계속 이뤄졌음을 입증했다.

제주4.3연구소 오승국 사무처장은 "그동안 제주4.3사건 관련 자료는 미국립문서기록보존소에서 입수한 것이 사실상 전부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 문서보관소에서 4.3관련 자료가 나올 줄은 몰랐다"면서 "이를 계기로 4.3관련 자료의 추가 발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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