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1) 우치난츄의 섬, 오키나와 1  

▲ 탐미협 회원들의 20년 만의 해외 동행.(이 사진은 광각렌즈로 촬영되었음). ⓒ박경훈

 

지난 2월 19일부터 23일까지 필자가 회원으로 있는 <탐라미술인협회>는 단체로 오키나와를 여행했다. 20여 명의 회원들이 참여한 이번 여정의 목적지인 오키나와는 제주와 너무나 비슷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섬이었기에 남달랐다.

고대왕국 탐라와 근세까지 존재했던 해상왕국 류큐, 본토의 변방으로 내몰렸던 지방사의 역사, 4.3과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민간인 학살을 낳은 불행한 현대사의 경험, 특히 적국이 아닌 자국정부의 버림을 받았던 내부 식민지라는 공통점, 그리고 강정과 등치되는 헤노코마을의 힘겹고 지난한 군사기지건설반대투쟁 등은 오키나와를 단지 남방의 아름다운 산호섬으로만 인식할 수 없게 한다.

이 글은 중간 중간 메모한 기록들과 여행 중의 상념들을 떠올려가며, 오키나와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을 다녀와서 오키나와가 무엇인가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싶어 쓴 글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는 그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오키나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므로 이 글은 꽤 장광설이며, 결코 여정을 따라가는 충실한 기행문은 아니다. 


[프롤로그] 여행은 MT다

우리는 어쩌면 다소 생뚱맞은 관광객이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안 선생’은 처음에 우리를 보고 황당했다고 한다. 대부분 공항 대합실에서 여행단의 이름이 적힌 패널을 들고 있으면, 그 아래로 총총 모이는 것이 관례이련만, 이 팀은 어찌된 일인지 제주말로 ‘비룽이(빤히, 번듯이)’ 쳐다보면서 무슨 일이 그리 급한지 공항 로비를 빠져 나갔으니 황당할 수밖에.

특히 우리 강요배 화백께서 가장 먼저 비룽이 지나쳤고, 필자를 포함하여 먼저 대합실로 나온 멤버들 중 지긋한 남정네들은 대부분 버젓이 그 앞을 무시하듯 지나친 셈이다. 사실 대부분 담뱃값 인상이나 그토록 유행하는 금연 캠페인과는 관계없는 애연가들이라서 우선 급한 불 끈다(흡연 제일주의)고 지나친 결과였는데, 그것이 40인 여행단까지 깔끔하게 소화해내는 배태랑 가이드를 황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버스에 올라서도 누구 하나 가이드를 치켜세우며 박수 한 번 쳐주지 않았으니 생뚱맞기 그지없는 팀이었을 것이다.

탐미협은 창립 20년이 다 되도록 단체로 어디 가본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멤버들 중 바깥나들이는 필자가 좀 다닌 편인데, 이번에 단체에서 큰 맘 먹고 움직인 것이다. 헌데, 참말로 이미 예상된 일이긴 하지만, 나중에 호텔방 구석에서 우리들 주량의 실체, 신토불이(사실 엔고로 인한 고육책의 결과)의 산물인 소주병이 쌓인 모습을 보면서, 만고의 진리인 말수와 빈 술병은 정비례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같은 섬에 살면서도 시공간을 공유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는 처지인지라, 이번 탐미협의 외유는 그동안 못 다한 ‘조직(?)’의 MT를 한꺼번에 해치우는 압축적 효과가 있었고, 이는 향후 조직의 발전을 위해 지독히 큰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되는바, 어느 단체든 조직의 모임이 잘 안 이루어질 때는 여행을 가라. 그러면 열리리라. 친화력 있는 인간관계와 말문이 말이다. 


자기 땅에 유배된 삶, 섬의 숙명

이번 오키나와 여행은 필자에게는 세 번째였다. 그만큼 오키나와는 낯설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오키나와에 대한 이방인의 풍경화 한 점, 기행문 한 편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오키나와와 제주를 연관시켜 깊은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방문은 온전히 오키나와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제주를 알고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이나 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우리와 상당한 동병상련의 인연을 느끼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와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환경, 똥돼지와 같은 풍속들, 내부식민지로서의 침탈의 역사, 더 나아가 최근의 군사기지 파동 등을 이어 얘기하다 보면, 오키나와와 제주도가 다른 섬이 아니라 같은 역사와 같은 곤란에 처해진 ‘섬의 숙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게 다가온다.

섬은 숙명이다. 사통팔달의 바다로 열려 있건만,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나 섬은 그 바다로 인해 침탈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생업의 현장이며 생명의 보고인 바다가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이미 섬은 손발이 묶인 채 저항하지 못하는 유폐된 운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섬들의 운명이요, 역사였다.

오키나와(沖繩, Okinawa), 동경 127°48′20″ 북위 26°20′5″에 위치한 점들의 선. 일본 열도의 남단, 규슈 남쪽으로부터 타이완에 이르는 약 1,300㎞의 해상에 활처럼 연이어 펼쳐지며 연결된 200여 개의 섬을 통칭한다. 지질학에서는 ‘류쿠호(琉球弧)’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나와 제도(沖繩諸島)’를 이르는 말이다.

오랜 옛날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 불렸던 해상왕국의 섬이었으며, 평화 시에는 교류의 징검다리로, 각축의 시대에는 침탈의 대상으로 영욕을 다했던 섬나라였다. 지금은 더 큰 섬나라의 지방으로 편제된, 그것도 아주 고약하게 위치 지워진 아름답지만 슬픈 섬의 이름이기도 하다.

▲ 구글 위성으로 본 류큐호, 오키나와제도, 오키나와.

후쿠시마(福島, Fukushima). 어느 날 갑자기 문명사적인 명성을 얻은 지명이다. 2010년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일본 도호쿠 지방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에 의해, 안전신화의 원전이 일대 타격을 입으면서(아직도 핵발전소는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환경재앙의 도래는 전 인류에게 문명사적인 쇼크를 주었다.(단 한 나라,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의 대한민국 정부만 빼고 말이다.)

인간의 망각은 현실의 변화보다 빠른 것이어서 후쿠시마 사건은 세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렸으나, 여전히 후쿠시마에서는 진행형이다. 후쿠시마의 원전은 핵분열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다. 하지만 그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은 후쿠시마 지방의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원전에서 얻은 전력은 거대한 송전선로를 통해 도쿄로 보내져 도쿄의 공항과 항만의 주요시설, 지하철과 각종 도시 기반 시설들, 도쿄시민들의 생활에 쓰이기 위한 것, 즉 회사이름 그대로 ‘도쿄전력’이었다.

▲ 2011년 폭발 당시의 후쿠시마 핵발전소(왼쪽). 2년이 지난 후, 후쿠시마 반경 20km 이내 주민들이 소개된 마을의 주인 잃은 소들.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지경의 마을에 주인을 기다리는 동물들만 서성이고 있다.(오른쪽)

전력(電力)에 있어서 후쿠시마가 도쿄를 위한 전력공급지였던 것처럼, 오키나와는 도쿄를 포함한 혼슈(본주)로 상징되는 일본국의 군사적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미일군사동맹의 조차지이면서 군사적 안전보장의 공급지였다. 적어도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의 안전 보장과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략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는 ‘전략적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의미’에서의 후쿠시마였다.

그러나 후쿠시마의 원전이 도쿄를 위해 존재한 것처럼, 이 안전은 일본의 안전이었지 오키나와 주민들의 생활상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오키나와는 전략지도 상의 지점이 아니라, 바로 살아야 하는 삶의 터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오키나와 제도. ⓒ박경훈

오키나와는 과거 태평양전쟁 당시에도 일본제국 본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지연작전, 즉 단지 며칠 또는 길어야 한두 달의 시간을 벌기 위해 전 주민을 전장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10만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일본 영토 내에서 유일하게 지상전(地上戰)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본토의 안전판 역할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맞물려, 오키나와는 내어주고 그 과실은 본토가 떠먹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에 있어서 오키나와는 언제나 도마뱀의 꼬리였을 뿐이다.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9년 메이지정부 당시 소위 ‘류큐처분’에 의해 일본제국에 통합된 지 130여 년이 됐으며, 패전 후 27년간 미군정기를 거쳐 1972년 일본에 반환된 후 현재에 이른다. 하지만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을 ‘우치난츄’, 본토인을 ‘야마톤츄’라고 구별해 부른다.

언제든 잘려나가거나 잘려진 채로 일본이라는 국가주의에 포획된 사냥감 같은 자신들을 본토인과 동일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키나와는 단 한 번도 야마토인으로 대우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우치난츄’로서의 존재감은 잘린 도마뱀의 상처가 깊어갈수록 커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치난츄’와 ‘야마톤츄’, ‘류큐’ 그리고 ‘오키나와’

슈리성은 세 번째 방문이다. 어떤 일로 오키나와를 찾든 간에 시간이 남아 관광지 하나쯤은 볼 거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리성은 관광객이든 아니든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전 당시 수비군인 32군이 슈리성 아래에 총사령부를 설치해 방어전을 펼친 덕에 완전히 파괴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이곳이 이제는 말끔히 복원되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사실 세계유산은 이 복원된 성의 땅 밑에 보존된 슈리성터다.) 그런 덕에 이 성은 이제 오키나와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오키나와시대 이전의 류큐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번 슈리성에 들르면 마음이 참 착잡해진다. 그것은 사라진 유적을 복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 때문이다. 사라진 유적을 복원하면, 또한 사라지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폐허에도 기억이 존재한다.

어쩌면 폐허의 기억이 더욱 강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강력한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슈리성의 폐허는 오키나와전의 기억의 비석이었다. 그러므로 폐허를 복구하고 원형을 복원한다는 일은 곧 이미 진행된 또 다른 기억과 존재를 삭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2000년 제주시에서도 국비를 투자하여 옛 목관아를 복원했고, 제주의 중세 조선의 경관이 눈앞에 살아났다. 그리고 그 유적 - 목관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마치 포르말린에 넣었다 꺼낸 듯 말쑥한 복원건축물들은 어쩌면 유령 같기도 하다. 신체는 있되 실체는 없는, 보이기는 하되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감 말이다.

추체험과 실재하는 존재감 사이의 괴리감 그리고 불일치의 간극들. 그리고 그 복원유적을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습을 보면, 불 한번 때지 않은 신축건물이 마치 조선왕조 내내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이것은 마치 태권도의 약속대련 같은 거다.) 대해질 때, 이러한 인간의 기억의 방식과 복원의 정당성은 모호해진다.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은 중층적인 것이다.

특히 정체성의 문제와 연계될 때, 복원 건축물, 공간의 이미지는 혼란스럽다. 이마저 없는 것보다는, 단지 몇 줄의 텍스트와 퇴락한 기록사진 쪼가리로만 남은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일면 설득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원본이 아니라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건물의 표면을 만진다거나, 그 공간을 거닌다는 것은 인간이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실재하는 물질성과 존재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험이다.

이곳 슈리성 앞에서 느끼는 감정도 그러하다. 그래서 착잡해진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 성곽을, 이 정전을 보면서 ‘류큐’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이 유적을 복원하여 세계만방에 류큐왕국의 존재를 알리면서, 류큐를 지운 나라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건축물의 더미들은 어떻게 읽힐까? 과연 이 건물의 상징성과 오키나와인들의 정체성은 어떤 관계일까?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기는 마찬가지다. 복원된 슈리성의 찬란한 붉은 빛의 건축물과 화려한 용문은 복잡한 오키나와전의 이해보다 더욱 힘든 고민을 하게 한다.

“아무리 ‘야마톤츄’가 되려고 마음먹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우치난츄’다.”라는 말은 1980년대 12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오키나와현 지사를 지낸 ‘니시메 쥰지(西銘順治)’의 말이다. 이 말 속의 ‘우치난츄(ウチナーンチュ)’란 오키나와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본토의 일본인을 의미하는 ‘야마톤츄(ヤマトゥンチュ)’에 대비되는 것으로 오키나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자신들은 본토인, 즉 일본인인 야마토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임을 강조하는 용어인 것이다. 하지만, 오키나와 섬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이 언어의 형성과 정착과정은 오키나와 역사의 역설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슬픈 연대기의 언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는 ‘오키나와 제도’ 또는 ‘오키나와현’ 전체를 가리키는 ‘우치나(ウチナー)’라는 말은 원래 오키나와 본섬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류큐왕국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오키나와제도 전체로 확장된다.

오키나와 제도의 160개의 섬 중 4개의 큰 섬들, 즉 이시가키지마(石垣島), 이리오모테지마(西表島), 미야코지마(宮古島), 구메지마(久米島) 등은 물론 오키나와 본섬 역시도 강제 병합 이전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오키나와 방언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표준어(일본어)를 강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섬들끼리도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병합 이후 류큐왕국의 전통을 해체하고, 일본본토와의 통합정책, 즉 야마토 지배와 ‘일본동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우치난츄 의식’이 비로소 보편화된 것이다. 일본으로의 통합과정 전체가 그 이전까지 협애한 지역과 상이한 언어, 왕조의 신분격차로 인해 분점되어 있었다면, 일본 복속과정에서 ‘오키나와’를 하나의 범주로서 지속적으로 호명하고 또 실질적으로 제도적, 문화적 통합을 진전시키면서 역설적이게도 오키나와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이지원, 2004.)

‘류큐’는 오키나와의 독립적인 해상왕국의 이름이다. ‘류큐’는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 기록된 ‘유구(流求)’의 문자를 시작으로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원사(元史)》 등에는 ‘류규(流虯)’, ‘류귀(流鬼)’, ‘류구(留求)’, ‘류구(留球)’, ‘류구(留仇)’ 등의 문자가 사용되었는데, 명 태조 때 류구(流求)로 개정된 이후 일본이나 조선이나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류큐’라는 말이 오키나와 고유의 말은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의 섬들에 전해 오는 민간전승의 신가(神歌)와 류큐왕국 왕부의 고문헌인 《오모로소우시(류큐국의 가요집으로 1531년~1623년 사이에 슈리왕부(首理王府)에 의해 편찬된 고문헌이다.)》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류큐’는 중국계 사서에 비슷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공과 책봉의 아시아적 국제관계 속에서 불리기 시작한 국명인 듯하다.(호카마 슈젠)

1816년 영국의 함선 리라(Lyra)호 함장 바질 홀(Basil Hall, 1788~1844) 대위는 중국 청조와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방문했던 영국의 ‘애머스트 사절단’을 호송하고 난 뒤 돌아가는 길에 조선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류큐의 ‘나하’에 40일간 머문다. 그는 귀국하여 항해기를 발간하는데, 《자바, 중국 그리고 류큐섬 항해기와 나폴레옹 회견기》라는 책도 그중의 하나다.

여기에는 귀국하는 와중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들러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 대화중에는 조선의 갓과 곰방대를 보고 신기해하는 대화도 들어 있는데, 홀이 류큐에서의 체류 일화를 말하며 ‘무기 없는 평화’를 소개하자, 나폴레옹은 “정말 아무 무기도 없단 말인가? 대포도 소총도 없단 말이냐? 그래도 창은 일을 것 아닌가? 아니, 단도도 없단 말이냐?”라고 놀란다. 바질 홀이 “저희가 아는 한 그들은 결코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으며, 평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나폴레옹은 “도대체 저 태양 아래 전쟁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느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던 일화가 있다.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탐험가 바질 홀의 항해기가 쓰여진 시대, 그러니까 세계적인 차원의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의 시대에 ‘류큐’는 이렇듯 무기와 군대가 없는(물론 이에 대한 사정에는 사스마번의 침공으로 인해 무력의 소유를 금지한 제도적인 배경이 존재한다. 가라데의 원류로 알려진 공수도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단련된 무기 없는 무술이었다. 하지만, 당시 바질 홀은 류큐에서 본 것만을 기록했으므로 저간의 사정은 몰랐을 수밖에 없다.) ‘평화의 나라’였다.

‘오키나와(沖繩)’, 1879년 ‘류큐처분’으로 갑작스레 패망한 류큐왕국에 대한 회한과 침탈의 시대를 담고 있는 애증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키나와’라는 지명의 유래 역시 분명치는 않으나,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일본 에도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인 《남도지(南嶋志)》에 처음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키’(크다, 난바다)와 ‘나와’(어장 또는 장소)라는 고유어가 있으므로, 그 뜻은 ‘큰 곳’을 의미한다.(호카마 슈젠), 즉 ‘대해의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충승(沖繩)이라는 일본어의 한자 그대로 해석하여 ‘앞바다, 또는 넓게 펼쳐진 개활지’ 등의 뜻과 ‘줄, 노끈’ 등의 의미를 결합하여, ‘열린 바다에 있는 끈(Rope in open sea)’이라는 뜻으로도 일반에 알려져 있다.

‘오키나와’라는 말은 외래의 ‘류구’와는 달리 오키나와의 ‘고유어’임을 알려준다.(호카마 슈젠) 그런데, 역설적으로 고유어인 오키나와를 현(県)의 이름으로 붙여준 이는 다름 아닌 그 고유어의 국체인 류큐왕국을 타파한 본토정부라는 사실이다. 또한 오키나와가 되고 나서야, 오키나와인들의 의식 속에 비로소 우치난츄라는 공통적인 정체성의 자각이 공유되었다는 사실이다.


메이지유신 때 강제합병 당한 나라, 류큐왕국

 

▲ 태평양전쟁 전의 슈리성의 모습. 성이 나하항까지 바로 연결되어 있다.

1871년 11월 대만의 동남부에 표착한 류큐왕국의 미야코지마(宮石島) 주민들 54명이 대만 현지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소위 ‘대만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메이지정부 내부에서는 류큐의 청일양속상태를 해소하고 일본에 전적으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거세게 인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외무성의 요구에 따라, 메이지정부는 류큐정부에 메이지유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고, 1872년 9월 류큐왕국의 유신 경하사(慶賀使)가 동경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자 메이지정부는 9월 14일 곧장 류큐국을 페지하고, 그 대신 ‘류큐번’을 설립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치밀한 정치적 술수였다. 일본의 메이지정부는 1년 전인 1871년 7월에 이미 ‘폐번치현’(廃藩置県, 이는 헤이안 시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봉건적 토지지배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메이지 유신의 최대 개혁이라 말할 수 있다.)을 폐지하고, 메이지유신의 산물인 ‘도도부현’(都道府県) 제도를 도입한 상태인데도, 차후 류큐의 병합이 국내문제임을 대외에 인식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한 것이다.

즉, ‘국’에서 신생 근대적 제도인 ‘현’으로의 합병은 ‘외국을 지방현으로 강제병합’하는 이미지와 외국의 반발 등의 문제가 존재하지만, ‘국-번-현’으로의 변경은 일본 국내문제임을 국제적으로 인식시키는 근거로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류큐국의 마지막 왕, 쇼이라(尙泰).

메이지정부는 국왕인 ‘쇼타이’(尙泰, 1843년~1901년, 재위기간: 1848~1879년)를 ‘류큐번’의 ‘번주’로 삼으면서 ‘후작(侯爵)’으로 임명, 일본의 귀족인 화족(華族)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류큐왕국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다. 1850년대에 ‘류큐왕국’이 구미제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계받는다. 이 당시 류큐 지배층은 이러한 급격한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 즉, 사쓰마번의 오랜 간섭을 벗어나고 메이지정부의 지원금도 들어온다는 당장의 여건 속에 낙관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의 판단이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시기 일본은 ‘대만사건’을 빌미로 소위 ‘대만출병(台湾出兵)’을 강행했다. 3,000명의 군대를 대만으로 보내 강행하게 되는데, 이 출병으로 류큐에 대한 기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류큐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 조정은 살해된 류큐 사람들에 대한 보상금과 타이완 점령지에 일본군이 설치한 시설물들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상호 책임과 권리를 명시한 외교적인 조문을 작성해 교환하게 되는데, 결국 이 조문이 청일양속관계에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의 고유의 영토로 인정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일본은 1879년 6월에는 ‘마츠다 미치유키(松田道를之)’를 대표로 4,000명의 군대와 160명의 경관을 파견하여 ‘류큐’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을 세우게 된다.(주강현) 이때 일본이 류큐의 명칭으로 새로이 붙인 ‘현명(懸名)’이 ‘오키나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명나라로 가는 류큐의 조공선. 수도인 나하에서 복건성 복주로 가는 데에는 대략 1주일쯤 걸렸다. 길이 40미터, 폭 15미터 정도의 이 배에는 한 척당 보통 100여 명이 승선하였으며, 2-4척이 같이 움직였다.(왼쪽 그림) 번영했던 류큐왕국의 왕성인 나하항의 옛 모습.(오른쪽 그림)

결국 ‘오키나와’라는 현재의 명칭은 강제적으로 폐한 류큐왕국을 지우기 위해, 일본제국의 질서 안에 오키나와를 포획하고, 제국의 신민으로 삼기 위해 야마톤츄들이 붙인 제국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통합은 우리가 아는 소위 근대민족국가의 통일과 민족의 완성을 위한 통합이라기보다는, 도마뱀의 몸통을 살리기 위해서 언제나 잘라 내버릴 수 있는 도마뱀꼬리로서, 강제병합 당한 ‘내부식민지’에 다름 아닌 역사경로를 걷게 한다.

그러므로 우치난츄들에게 오키나와란 현의 명칭은 제국주의시대-침탈의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일 뿐이며, 그 침탈의 역사는 현재에도 기지의 섬으로서 이어지고 있다. 마치 탐라가 제주로 바뀐 이래, 조선의 변방으로 편입되면서 늘 침탈의 땅이 되었듯이.

“17세기 초 사쓰마의 침공 이래 오키나와는 중국인도 아니거니와 일본인도 아닌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메이지시대에는 중국인도 아니거니와 일본인도 아니라고 취급되었으며, 2차대전 이후에는 미국인도 아니거니와 일본인도 아닌 이른바 ‘무국적’에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되는 등, 오키나와인은 ‘뿌리 뽑힌’ ‘아이덴티티 상실의 상황’에 처해왔던 것”이라는, 1996년 미군기지 강제사용계약의 서명을 거부해 파문을 일으켰던 오타 마사히테(大田昌秀) 전 지사의 고백은 오키나와인 공통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 흐린 날에도 에메랄드빛의 오키나와 산호바다는 늘 아름답다. 제주의 비경이 대부분 4.3 당시 죽음의 터였던 것처럼, 죽음의 땅은 모두 아름다운 것인가? ⓒ박경훈

‘류큐와 오키나와’는 ‘탐라와 제주’에 대응하는 말이다. 섬나라를 뜻하는 ‘탐라’는 오래전에 이 섬의 존재를 알았던 사람들, 도래인들, 유민들, 이주민들 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한 현재의 제주섬의 옛 이름이며, 탐라국이라는 고대왕국의 명칭이기도 하다.

문헌에 전하는 탐라섬에 관한 명칭을 보면, 주호(州胡), 도이(島夷),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동영주(東瀛州)·탐라(耽羅) 등으로 불리다가, 최종적으로 탐라가 대표적인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耽羅郡)으로, 의종 7년인 1135년에는 ‘탐라현’으로, 다시 고려 고종 10년경인 1223년에 탐라군을 제주군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제주라는 명칭이 불리게 되었고, 몽골지배기에는 다시 탐라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고려 반환 이후부터 조선조에 들어서는 완전히 제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지방의 명칭 변경은 단순히 향명(鄕名)의 변경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대국가가 사라지고, 중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체제에 편입되고 이탈되면서 이루어진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

오키나와 역시 제주섬과 같은 섬나라로서, 제주섬이 탐라에서 제주로 바뀌던 시기에 성립되어 최근세까지 그 정치체와 정체성을 유지해 온 섬나라라는 점에서, 우리와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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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오는 슈리성의 정전. 슈리성을 방문하는 날,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결국은 우산을 들고 슈리성 관광을 시작했다. 복원된 슈리성은 미군기지와 남방의 관광의 섬 안에서 역사유적도 테마파크도 아닌, 또는 둘이기도 한 어정쩡한 장소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목관아에서 느끼는 그런 묘한 기분이 비 날씨에 오락가락한다. ⓒ박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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