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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김관후 kghoo21@naver.com 2014년 06월 25일 수요일 09:05   0면

<김관후의 4·3칼럼> (26) 일제지원병에서 진압군사령관으로 내도한 함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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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의 선무귀순 작전에 따라 하산한 주민들.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 많이 보인다.

함병선, 그는 누구인가

제주에 파견된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은 일제 지원병 준위출신으로, 최경록 제11연대장, 송요찬 제9연대장에 이어 일본군 준위 출신이며 3대 연속 제주도지구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일본군으로서 만주 지역 등지에서 중국군이나 항일 빨치산과 싸웠던 전투 경력을 인정해 제주 진압전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305쪽)

‘정의의 칼이 빛나는 폭도의 최후의 사명(死命)을 제압할 날은 마침내 닥쳐왔던 것이니 함(咸炳善)중령이 지휘하는 국군의 정예 제2연대의 제주주둔이 곧 이것이다....(중략)..... 피투성이의 작전은 불과 4~5개월에 적의 주력을 섬멸하고 그 대부분을 포로로 하였고 양과 같이 선량한 백성을 적의 독아(毒牙)로부터 구원하였다..........(중략)........ 동행하던 이(李昌楨)소령은 20관이 넘는 어깨를 씰룩거리며 해방 후에는 우다(雨多)와 폭도다(暴徒多)를 합해서 오다(五多)라고 유머를 늘어놓는다. 기자는.....(중략).... 국군과 경찰의 파도를 뚫고 한산한 가두를 거쳐 함(咸)연대장을 찾았다. 반갑게 맞아주는 함(咸)중령은 제주에서 알려진 한라산의 호랑이라기보다 온정에 넘친 인간 함중령이다. 과연 그럴 것이다. 폭도측에는 호랑이거니와 도민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온 뜻을 말하고 당지 전투사령관 유(劉載興)대령의 자세한 실정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계속)’-국도신문 1949년 4월 21일

‘【본사 김영진 특파원 기(記)】(전략)......제주도 주둔 국군 제2연대는 종래의 작전대인 제9연대 제11연대의 뒤를 이어 작년 12월 28일 연대장 함병선(咸炳善) 대령 인솔 하에 상륙하여 불철주야 불안에 쌓인 제주도 소요사태의 진압작전을.......(중략).......그간의 전투경과에 대하여 제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대령은 왕방한 기자에 다음과 같은 피의 기록을 전하여 주었다. “금년 □월 1일부터 3월말까지의 섬멸전을 통하여 우리가 진실히 느낀 것은 전투 후의 진압에 있어 가장 긴요한 것이 인민계몽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국군이 주력한 것이 선무공작이었다. 이러한 선무공작의 효험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8,000명이라는 다대수의 귀순자 획득이었다. 이들 귀순자를 42개소의 재건부락 수용소에 수용하여 이중 34개소는 완전히 일반 민중과 동등취급을 하기로 되어 지금 수용소에 남아 있는 귀순자 수는 2,000명 밖에 안된다. 하여간 동족상잔이라는 누명과 비극을 회피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갖은 고생을 겪어가면서 선무공작을 맹렬히 전개하였는데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폭도측에서 사용한 화기는 MG․M1․카빈총․박격포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국군에서 사용한 것은 사제(私製) 30㎏폭탄 기관총 소사 화염방사기 37㎜대포 등이었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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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보병 제2연대 정문.

함병선(咸炳善)은 1920년 5월 30일 평양에서 출생, 숭덕중학을 졸업한 후  특별지원병 제1기로 일본군에 입대, 일본 패망으로 일군 준위로 제대하였다. 1946년 1월 15일 제1연대 A중대를 태능에 창설하고 중대요원을 모집하자 응시하였다.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제1연대의 대대구매관으로 보임되었다.

1947년 5월에 제2연대로 전출되었고 육군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8년 12월 7일 보병제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고, 중령과 대령으로 진급하는 한편 제14연대가 일으킨 여순10·19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 동년 12월 29일 제주주둔군이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되면서 함병선은 4·3사건 진압부대로 제주에 왔다.  

미군 비밀문서는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연대 제3대대는 바로  서북청년회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제2사단장과 제1군단장으로 함병선 준장은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1950년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문경 이화령에서 제6사단 2연대를 지휘하여 북한군 제1사단의 침공를 격퇴함으로써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5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5월 27일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 7월 육군본부 기획참모부장을 거쳐 1959년 1월에는 작전참모부장, 1960년 국방부 연합참모부장으로 보임되었다. 1961년 7월 14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2001년 2월 5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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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대로 가장한 2연대 특공대. 왼쪽 아래에 '暴徒로 假裝코'(폭도로 가장코)라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오는 6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는 국방부 제2회 합동위령제를 앞두고 제주도 폭도 소탕전에 혁혁한 무훈을 남기고 전사한 제주도 주둔 제2연대 소속 고병선(高炳善) 대위 이하 92주(柱)의 영령은 3일 오전 11시 서울역에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중령 이하 동연대 장병의 가슴에 안겨 무언의 개선을 하였다. 그리고 함(咸) 연대장은 역두에서 제주도 토벌감상을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만큼 한 희생을 내고 반도를 소탕한 것만은 다행한 일이다. 이 영령들의 뒤를 따라 살아있는 우리들은 국토를 끝까지 방위해야겠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4일

‘26일 귀성한 바 있는 시(市)선출 민의원 고담룡(민)씨는 30일 이도에 앞서 4․3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한계와 복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일의 국회 본회의에 국회조사단을 초치토록 재경 김(金), 현(玄) 양 민의원과 합력(合力)하고 긴급동의를 할 계획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선 최고책임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자료로서 1949년 3월의 유재흥(劉載興) 계엄사령관 부임 이후를 하나의 한계로 선을 그어놓고자 한다. 거기서 지적될만한 인물은 함병선(咸炳善), 신현준(申鉉俊), 김재능(金在能) 등 제씨이며 4․3사건 이후 사태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수는 경찰에는 2만 7,000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모은 기록으로 보면 6만 5,000 내지 6만 8,000으로 되어 있다. 도민으로서는 국회조사단에게 조사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일이 급선무인줄로 안다. 나에게 주어진 것도 몇 건 있는데 막연한 감이 없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것이 필요하다.’-제주신보 1960년 5월 31일

‘(전략)○… 신엄의 까닭모를 72명 집단학살 맨처음의 증언대에 나선 애월 하귀의 장갑순씨는 “서청을 비롯한 극악한 당시의 민폐는 본도 양민학살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애월면 신엄리 자운당에서 부친을 포함한 양민 72명이 까닭 모르게 집단적으로 학살”되었음을 폭로, “당시의 총살집행자는 함병선(咸炳善)씨를 연대장으로 하는 2연대의 소속 중대였다”고 지적하였다. 증언이 계속되는 동안 동 조사단 측으로부터 학살의 동기 및 그 후의 처리 등을 질문받자 장씨는 “부친은 일체의 정치단체 등에는 관여한 일도 없을 뿐더러 순박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상관계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총살자들은 구덩이를 파서 매장했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후략)’-제주신보 196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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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2연대 함병선 장군 공적비/제주 특전사훈련장 입구.

살육과 토벌로 무장대 거의 괴멸

‘16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보도대에서는 국군 제2연대가 제3단계의 작전에 돌입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는 폭도들에 대하여 철추를 내린 3월 9일 이후 동 15일까지의 작전 전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사살 181명, 포로 195명, 소총 3, 카빈소총 3, 99식소총 12, 수류탄 2, 탄약 34등 노획【제주 발 합동】(국방부 보도과 검열제)’-조선중앙일보 1949년 3월 20일

‘(전략)금년 1월 제2연대가 교체되어 일시 군의 진공상태가 있는 것을 엿본 반도는 다시 치열한 공세를 취했으나 함(咸)제2연대장의 민첩과감한 전술은 먼저 보급로를 끊고 정보수집, 민간동향, 선무공작, 주둔지 부근의 방어시설을 정비하는 동시에 계엄령 하에 위축당한 민심을 안도하게 하기에 노력을 경주하고 폭도의 귀순공작을 꾀하였다. 그리고 반도의 중심지 산간부락에는 지형상 미숙으로 작전이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전술로 착착 숙청하여 지난 3월까지에는 300의 무장폭도와 3만의 비무장 폭도 중 포로 912명, 사살 1,273명, 무기․탄약 회수 다수의 전과를 올렸다. 군과 경찰에서는 제주사태에 일층 관심을 갖고 군경에서 각각 1개 대대를 증파하여 군에는 전투사령부, 경찰에는 경비사령부가 생겨 일층 긴밀한 작전을 행한 결과 귀순 2,701명, 포로 3,641명, 사살 1,077, 무기․탄약 회수 다수 다량의 전과를 올렸다.(후략)’-조선일보 1949년 6월 3일 

함병선이 지휘하는  제2연대는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 작전’을 펴기에 앞서 ‘선무공작’에 나서려 했다. 그는 폭도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 이때 북촌 사건이 발생했고 봉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됐다. 

1949년 3월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소위 선무 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 주겠다”는 사면계획이었다. 하산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함병선은 하산한 주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 무기형, 15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1천6백60여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함병선 대령이 지휘하는 제2연대는 처음에 해안마을에 숙사를 정했다. 함 대령은 섬사람들의 계몽을 위한 선전 계획을 수립함과 동시에 반도들의 하산을 호소했다. 산에 은신해 있는 무장반도에 대한 공격행위의 중단은 그러한 계획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이에 고무받은 유격대는 방어부대의 코 밑에 있는 해안마을까지 공격하여 식량을 구해 가기도 했다. 그러자 제2연대는 다소 공격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마을 사람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1949년 1월 6일 제2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섰다. 이날의 전투는 ‘적의 유기시체 153, M1소총 1정, 탄약 500발, 일본도 및 죽창 다수, 피복, 선전삐라 다수 압수’라는 전과에 ‘국군 전사 3명, 부상자 5명’이라는 군 피해상황이 말해주듯 매우 치열했다. 

무장대의 99식 총으로는 제2연대의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1월 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약 200여 명의 무장대가 새벽 6시 30분에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무장대 사망자는 51명. 반면 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무장대의 공격은 곧 민간인에 대한 진압부대의 보복 총살로 이어졌다.  의귀국민학교에는 주민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제2연대 군인들은  이들을 학교 뒷밭으로 옮겨 모두 사살하였다. 이 때 희생된 80여  구의 시신은 나중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합장되었으며, 현재  묘역에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함병선이 이끄는 2연대가 살육과 토벌로 무장대가 거의 괴멸하고 나서야, 1949년 7월 제주를 떠난다. 4·3희생자 중 일본군 출신인 박진경-최경록-송요찬-함병선 4명의 연대장 재임시절에 전체의 90% 가량이 희생되었다. 

‘제주도는 공산도배의 준동으로 동란의 불바다로 변하였다........(중략).......그러나 제2연대가 진주하면서부터는 폭도에 대하여는 토벌과 귀순공작을, 주민에 대하여는 선무와 계몽에 밤낮없이 노력하여 산에 올라갔던 비무장 폭도는 거의 귀순하여 불과 500여 명이 남았고 무장폭도도 겨우 150명이 남아 완전소멸도 시간문제로 되게 되었다 한다..........(중략)......끝으로 함(咸)전투사령의 싸워서 죽이는 것보다 귀순시키는데 중점을 둔다는 온정의 말에 감격하며 사령부를 나왔다. 맑게 갠 하늘 아래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아도 배 한 척 볼 수 없다. 마치 주인을 잃은 바다인 양 쓸쓸하다. “우리는 벌써 1년이나 넘어 맛있는 생선을 먹지 못했수다” 사투리 섞인 그들의 애소(哀訴)는 포구에 생산없는 비애가 가장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중략)....... 1년만에 시내에는 육지로부터 기생도 오고 요릿집도 서너군데 생기고 하여 주정뱅이도 카빈총 사이를 비틀거리고 지나간다.’-국도신문 1949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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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

북촌리 대량학살 사건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 갔다. 토벌대가 공격해 가자 공비들은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마을로 숨어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장시간 소탕전이 벌어지고 북촌리는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濟州道警察局, <濟州警察史>, 1990, 315쪽.

북촌리민을 살해한 가해 집단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경찰은 2000년에 새로 <제주경찰사>를 펴낼 때에도 위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제주도경찰국은 결국 <제주경찰사>를 모두 회수했고, ‘4‧3관련 부분’을 도려낸 후 다시 배포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8월 13일 오전 11시경 북제주군 북촌리에서 경찰과 민중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여 양측의 각각 3명의 중상자, 다수의 경상자를 내었다고 한다. 동 사건의 원인은 동 부근에 다수의 삐라가 산포되어 있었으므로 경찰이 출동하여 부근 민중에게 발포를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제주조통】’-중앙신문 1947년 8월 17일

‘【제주지국 특신】 본도 사태를 답사하기 위하여 기자는 브라운 대좌와 함께 읍내에서 산길 밀림지대로 서귀포를 향발하였으나 산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으며 울창한 산림 속에는 들리는 산새소리 뿐 처참하리만치 괴괴하였다........(중략).....’△제1구경찰서장 담 : “본관은 경관 시체를 수사하려고 감찰청원과 1구서원을 대동하고 북촌리(조천면)에 가보았는데 어느 주택 마당에 천연굴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속에 사람이 있기로 빨리 나오라고 하니 7명은 나왔으나 2명은 죽어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3시간을 기다려도 종래 나오지 않기로 할 수 없이 경관이 굴속에 들어가서 붙들고 나왔으며 소지품은 수류탄 1, 화약과 삐라 약간이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4일

‘【제주 발 조통】제주도의 소요사건은 아직도 진압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 16일에는 우도지서원들이 공무를 띠고 조천면 북촌리에 상륙하는 찰나에 정체 모를 괴한 한 명이 돌연 나타나 동 지서원 2명(경사 1명과 순경 1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한 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한다. 이 정보에 접한 제1구 경찰서에서는 22일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서원을 총동원하여 경관□□□ 수색하였는데 북촌리에는 집집마다 무수한 지하굴이 있는 것을 탐지하였다 한다. 현재 발견된 지하굴은 12개소나 된다고 하며 그곳에 잠복한 9명의 소요민이 체포되고 화약과 수류탄도 약간 압수되었다 한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27일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마을은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동년 12월 19일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가 제주에 들어오면서 정준철 소령이 이끄는 3대대가  함덕에 주둔하게 된다. 거기에는 서청단원들도 합류되어 있었다. 

1949년 1월17일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남녀노소 4백 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고 모두 불탔다. 아침에 세화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일부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 마을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마을원로들은 시신을 들것에 실어 대대본부로 갔다. 군인들은 10여명의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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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녀자들이 죽창을 들고 마을 보초를 서고 있다(1949.3)<「제2연대 제주도주둔기」 앨범에서.

군인들은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운집한 사람들은 사색이 된 채 공포에 떨었다.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불을 뿜더니 한 주민이 쓰러졌다. 운동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휘관은 다시 주민들을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을 구분하여 군경가족을 제외한 주민들을 학살할 준비를 한다.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타고 온 앰뷸런스 안에서 즉석 회의를 했다. 한 장교가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 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대대장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자 총살은 멈추었다. 3백여 명 이상이 곳곳에서  쓰러진 뒤였다.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눈이 덮인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나중에야 야산에 묻혔다. 엄마 품에서 함께 죽어간 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임시 가매장한 채로 묻혔다.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들을 함덕리로 소개해 100여 명을 또다시 총살했다. 

그 후  속칭 ‘아이고 사건’이 1954년 1월 23일 벌어졌다. 한국전쟁 전몰장병인 김석태(金錫泰)의 고별식이 열린 날이었다. 학교 교정에서 전사자의 고별식과 속칭 ‘꽃놀이’를 하던 중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소각된 날이며 여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는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묵념을 하게 됐다. 그 때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한 것이 경찰에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북촌리 사건은 함병선과 이승만과 미군정이 주도한 사건이다. 함병선은 ‘선-선무 후-토벌’ 전략으로 한라산 공비를 사실상 전멸시킨 주인공이다. 서귀포에는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가 세워졌고, 1949년 7월 7일에는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둘째, 이재민의 현상에 대하여 : 산간, 목축지대는 물론 해안지대 부락까지라도 우선 남원 북촌 동복 서귀포의 4ㆍ3사건 후 소실된 가옥이 1만 6,177호에 3만 461동, 양민 피해자수 1,193명, 부상자수 419명, 이재민수 8만 6,797명으로 차등(此等) 이재민은 식량, 의류를 □철할 틈도 없이 피난한 관계로 문자 그대로 돼지우리처럼 만든 집속 땅바닥에 건초를 깔고 그냥 기거하며 해초 산초로써 그날 그날 겨우 연명하여 가는 형편이고 누구할 것 없이 허기에 신음하고 있으며 집 내외는 악취가 진동하여 견딜 수 없었다. 방문을 하면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만 지을 뿐 이 가련한 꼴을 바라보는 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자유신문 1949년 3월 23일

봉개리에서 함명리로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 날만 새면/ 거르지 않던 동네 식게/ 영장집 가마솥/ 인젠 찾아볼 수 어싱게// 가을이면 갈중이 풋감 물들이고/ 겨울 한낮엔/ 푹푹 내려쌓던 돌담 눈길로/ 키보다 큰 꼬리연 입김처럼 날리던/ 중산 부락/ 나의 봉아오름//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젓시더니// 안반 다락/ 이불 베개 삼던 漢書籍 다 타고/ 볼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金海 金氏 뭊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더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김종원의 시 ‘奉蓋洞’

‘지난 4일 상오 3시를 기하여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함병선(咸炳善) 연대장 지휘 하에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방금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 하는 바, 그동안 제2대대 제7중대의 과감한 용사들은 소위 인민군 재판장 강태문(姜泰文) 살대장 박응수(朴應洙)등을 비롯한 폭도 간부들을 체포하고 제3대대에서는 반란군 1등중사 고영준(高英俊)을 체포하는 등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판명된 전과는 다음과 같다.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식량 의류등 다수압수(국방부 검열제) 【제주 발 합동】’-조선중앙일보 1949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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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개리가 연대장과 작전참모의 이름을 조합한 '함명리'란 얄궂은 이름으로 바꾸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갱도진지를 파놓았는데, 4·3당시에는 봉개리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일부 주민들은  대나오름으로 옮겨졌다. 주민들은 점점 위험을 느껴 낮에는 산위나 다른 먼 곳으로 피신했다가 저녁이면 돌아왔다.  

1948년 11월 20일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다시 1949년 1월21일, 군인, 경찰, 대한청년단 등 합동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움막 등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을 붙잡았다. 또한 명도암 오름 등 마을 주변에 숨어 지내던 주민 40여명을 멀왓 동산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 하기도 했다. 

대토벌은 계속되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국방부는 "봉개지구에서 함병선 연대장 지휘 하에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면서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식량·의류 등 다수 압수"라는 전과를 발표했다.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으며, 압수품에 총기는 없었다. 

그 후 주민들은 성안에 함바집을 짓고 살았다. 마을 재건은 소개당한 마을 중에 처음으로 복구가 이뤄졌다. 함병선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봉개리는 제2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 등 '봉개7인당파'로 인하여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렀다. 7인당파는 좌익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김용관·김응배·이순진· 현갑생·강응추·임태종·김영순 등을 말한다.

특히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마을 재건 당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였다. 성안에는 십자로(十字路)를 새로 뚫어 십자로 사방으로 함바집을 짓게 했다.

6년 만에 내도, 환영회 참석

‘육군 제2훈련소장 함병선(咸炳善) 중장이 작(昨) 3일 상오 11시 동소(仝所) 미(美)수석고문 맥트날 대령을 대동하고 모슬포에 비래(飛來)하였다. 함 중장은 이날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의 시설과 사병 훈련상황 등을 순시하였으며 이날 밤은 모슬포에서 1박, 금 4일 낮까지 육1훈(陸一訓)에서 머무른 후 그곳을 출발 동회(東迴)로 하오 4시경 내읍한다. 읍에서는 도 체육회 주최로 도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함 중장 내도 환영 축구시합이 있으며 제주농고와 오현고 팀이 모범게임 한다. 저녁에는 제주읍 주최로 환영다과회도 있을 터. 5일 모슬포 경유 이도할 예정. 함 중장은 일찍이 4․3사건이 최고조일 무렵 보병 제2연대장으로서 재산공비 섬멸에 크나큰 공훈을 세워 도민의 은인으로 알려져 있다. 함 중장은 이도 6년만에 제주도를 찾아온 것이다.’-제주신보 1955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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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가 되었던 마을들이 복구되기 시작했다.(1949)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 앨범>.

함병선 중장은 1955년 2월 4일 육군제1훈련소장 대리 오창근(吳昌根) 준장과  함께 봉개리를 방문하였다. 물론 함병선을 기념하고자 부락명은 ‘함명리’로 개칭하고 있었다. 그는 부락민으로부터 도열 영접을 받았으며 6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동리 노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하였다. 그리고 현호권(玄好權․77년) 씨의 오막살이를 찾아 금일봉을 희사 “광명을 찾아 굳건히 살아가시라”고 위무 격려하였다. 그리고 함명교회에도 금일봉을 희사하면서 교회 대표에게 “하나님의 가호 아래 함명리가 더욱 번영하도록 기도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다음날 아침 함병선은  한림면 옹포리에서 4․3사건 당시 전몰군인 충혼비에 화환을 증정하였으며 제주읍 삼양리 지서 앞의 순직경찰관비에도 화환을 증정, 치열했던 사건당시를 회고하면서 순화한 군경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체육계 진흥에 공헌한 307특무대장 허세선 중령을 맞아 체육회에서는 환영 축구시합을 개최하였으며, 저녁에는 시내 귤림회관에서 제주읍 주최로 각 기관장 유지들이 환영다과회를 가졌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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