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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양병윤 화백.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정만 뉴시스 제주취재본부 본부장

이렇게 홀연히 떠나셨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바쁘셨습니까?
여기 책상에 선배가 갈아 쓰던 붓과 먹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천상으로 가지고 가려 하십니까?
그 무지무지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황우럭’을 하늘에서 그리려고 하십니까?

‘황우럭’ 1만회가 다가오면서 선배님은 무척 들떠 있었습니다.
1만회라는 경이적 기록에 본인도 대견한 듯 설렜지요.
2013년 4월12일 1만회 행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지요.
생전의 동지들이었던 ‘고바우 영감’도 ‘나대로 선생’도 모두 축하하러 오셨고, 모두 기분이 째져 대취했지요.

사실 시사만화 1만회의 기록은 굉장히 어렵답니다. 산악인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정상을 등정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겠지요,

그 때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문 만화를 마감하면서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했지만, 마감하고 나면 늘 완성도가 모자란 것 같아 후회됐다"

또 이렇게도 말했지요. "만화를 그리는 긴장 속에서 그날그날 마감을 할 때마다 나름대로 묘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께서는 1968년 5월10일 ‘황우럭’을 탄생시켰습니다. 선배의 출생연도가 1944년이니까 24살의 나이였지요. 그 때까지 무명에다 이곳저곳에서 받았던 설움을 딛고, 현재까지 장장 40년 이상을 ‘황우럭’을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그동안 황우럭을 통해 권력은 한낱 우스개로 전락하고, 묘사된 서민의 애환은 우리의 일상 그대로를 느끼게 했지요. 개그 같은 풍자 속에 시대의 정신을 뚫어 보는 날카로움이, 서로를 위로하는 정이 철철 넘쳐났다고나 할까요.

40년의 세월 속에 ‘황우럭’은 양병윤이 됐고 양병윤은 ‘황우럭’이 돼 어디든-그것이 권력의 심장부 든- 거침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꺾일 줄 모르는 붓 하나로.

우리는 그래서 선배를 양병윤 이라는 이름 대신 ‘황우럭’이라는 삼인칭으로 부르거나, ‘우럭이 형’이라는 애칭을 줄곧 썼습니다.

때로는 선배가 들려주는 해학이 만화 황우럭 보다 더 진득할 때가 있었고, 세상을 비꼬는 풍자가 만화 황우럭에서보다 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도 했답니다.  만화에서 다 드러내지 못한 그 ‘보따리’를 특유의 언설로 풀면 웃지 않고 배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특히 20대에 시작했던 언론인으로서 그동안 봐 왔던 언론의 ‘뒷얘기’를 들려줄 때는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제주 언론이 걸음마를 뗄 무렵, 그 뒷골목의 풍경은 선배의 기억과 회상에서 나와 제주언론의 역사로 살아나곤 했습니다. 

선배는 이치의 잘잘못을 따질 때는 무를 칼로 자르듯 분명했답니다. 너무 가혹하리만치 이분법을 들이댈 때가 있었지요. 다만 그 때는 호오(好惡)의 가름이 아니라 선악이 잣대의 기준이었습니다.

또 있지요.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마치 모 방송국의 가요무대 프로에나 출연한 것처럼 좌중에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락을 뽑으면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요. 너무 잘 불러서였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 정중한 인사법이 좌중을 흡인(吸引)했기 때문이랍니다.

인간 양병윤은 이래서 우리들 기억 속에 널따랗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도 지상에서의 일을 끝내고 마감했습니다.

꿈만 같습니다. 홀연히 떠났기에 더욱 회한이 가슴을 칩니다. 평소 잘 해드릴 것을.
우리는 ‘황우럭’ 양병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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