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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과 혈연관계를 가진 탓으로…”

김관후 kghoo21@naver.com 2015년 12월 07일 월요일 09:28   0면

<김관후의 4·3칼럼> (56) ‘귀신 잡는 해병’ 창설의 주역 친일군 출신 신현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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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해병 제1여단 군기를 받고 있는 신현준 장군.
‘26일 귀성한 바 있는 시(市)선출 민의원 고담룡(민)씨는 30일 이도에 앞서 4․3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한계와 복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일의 국회 본회의에 국회조사단을 초치토록 재경 김(金), 현(玄) 양 민의원과 합력(合力)하고 긴급동의를 할 계획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선 최고책임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자료로서 1949년 3월의 유재흥(劉載興) 계엄사령관 부임 이후를 하나의 한계로 선을 그어놓고자 한다. 거기서 지적될만한 인물은 함병선(咸炳善), 신현준(申鉉俊), 김재능(金在能) 등 제씨이며 4․3사건 이후 사태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수는 경찰에는 2만 7,000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모은 기록으로 보면 6만 5,000 내지 6만 8,000으로 되어 있다. 도민으로서는 국회조사단에게 조사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일이 급선무인줄로 안다. 나에게 주어진 것도 몇 건 있는데 막연한 감이 없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것이 필요하다.’-제주신보 1960년 5월 31일

신현준(申鉉俊, 1916~ 2007)은 경상북도 김천군 출생이며, 민조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2007년 10월 15일 작고하였으며, 해병대 창설의 주역으로 한국해병대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1915년 10월 23일 경북 금릉에서 출생한 그는 부모를 따라 1919년 2월 만주로 이주해 장춘(長春)과 하얼빈 근처 농촌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1928년 1월 빈민구제기관인 하얼빈의 인화료(仁和療)로 가족이 모두 이주했다. 1932년 2월 하얼빈 보통학교 고등과를 중퇴하고 만주 파견군 14사단 사령부의 사단참모 다데이시(立石方亮) 대위의 전속 통역으로 종군하였다.

1934년 2월 14사단 작전참모 세키하라(關原六) 대좌의 권유로 만주군 제5관구 고문부(顧問部)에서 1935년 3월까지 통역으로 근무했다. 1935년 3월부터 세키하라 대좌의 후견 아래 청더(承德)에 있는 만주국군 보병 제34단 본부에 배속되어 단장을 수행하면서 통역을 담당했다. 1936년 6월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고 1937년 9월 제5기로 졸업했다.

1937년 10월부터 박격포중대에서 견습 군관으로 복무한 뒤, 같은 해 12월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이해 말 대각진(大閣鎭) 부근에서 이장명(李長明)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배장(排長 : 소대장)의 한 사람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1938년 4월 제5군관구 제5교됴내 예하 보병 제5사단 제6련에 배치되었다.

1938년 12월 1일부터 제6관구 옌지(연길)지구사령부에 부임해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으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모두 108차례 공격했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하였다. 

1940년 우다카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로 창씨개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국경사변종기장(國境事變從軍記章)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훈춘농업고등학교와 훈춘협화회 산하 청년훈련소에 배속장교가 되었다. 1941년 3월 중위로 승진하였다. 1942년 2월 안투현(安鬪縣)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전임해 근무하다가 1943년 4월 간도특설대로 원대복귀하였다. 이후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 기관총 박격포 중대)에서 백선엽 소위(봉천군교 9기)와 함께 근무했다.   1943년 12월 간도특설대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토벌작전을 지원하라는 만주국 치안부의 명령을 받고 러허방면으로 출동했다. 1944년 3월 1일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8월 만주국군 보병 제8단 제6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보병 제8단에는 박정희· 이주일 ·방원철 등이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신현준이 이끄는 제6련은 팔로군과 교전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8월 17일 일본인과 신현준을 비롯한 조선인 장교들은 제8단의 군인들에 의해 직위 해임되고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제8단 제3영 예하 제7련으로 전속되어 9월 미윤(密雲)으로 이동한 후 제8단을 떠나 박정희·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北平 : 베이징)으로 갔다. 이곳에서 광복군 제3지대 핑진(平津)대대에 들어가 대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이주일은 제1중대장을, 박정희는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46년 5월 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봉천군관학교 동기생 정일권의 권유로 해안경비대총사령부 견습사관으로 입대했다. 12월 한국군 중위로 정식 임관했다. 1947년 9월 해병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동시에 부산기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8년 5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참모장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에서 저항세력을 진압했다. 1949년 2월 초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해병대 병력을 제주도에 배치해 경비임무를 수행케 했다. 신현준은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다.

‘【서울발 합동】그동안 10일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귀경한 국회양민학살사건조사단은 10일 하오 제1차 전체회의를 열고 각 지방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의 조사결과를 청취한 끝에 11일 내무, 법무, 국방 등 3부 장관을 출석시켜 동 학살사건 발생 당시의 현지 주둔부대 및 관련자를 규명하고 또한 가해자 격인 그들 주둔 부대장 및 관련자를 상대로 조사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날 현지조사를 마치고 귀경한 최천 위원장은 시일이 짧아 완전한 조사를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미처 조사를 못한 학살사건은 수사당국에서 계속 조사하도록 일임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한편 최천 위원장은 학살사건 발생 당시의 현지주둔 부대책임자와 관련자가 판명되면 당분간 이들을 상대로 그 당시의 현황 및 증언을 청취한 다음 늦어도 이번 국회의 회기 중에 본회의에 조사 보고할 예정이라고 말하였다. 헌데 이번 조사도중 함양학살사건 당시 유임지서 주임 송□상씨와 거창사건 당시의 신원지서 주임 박대□씨를 위증죄로 당지 검찰청에 고소하였다고 밝혔다. 한편 1일에 열릴 국회양민학살사건조사단의 제2차 전체회의에는 내무, 법무, 국방 등 3부 장관과 제주도양민학살사건에 관련된 육군의 함병선중장과 해병대의 신현준소장 그리고 당시의 진해통제부 사령관을 출석시켜 증언을 청취할 예정이다.’-제주신보 1960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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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신현준 해병대사령관, 박광원 중위, 김성은 제1전투단장, 강기천 제5대대장 (1952년 10월).


‘귀신 잡는 해병’, 제주땅에 입도 

‘거반 해병대사령부에서는 본도민의 열성에 호응하여 모병을 실시한 바 있었는데 도내 우국청년의 조국사수와 승리를 맹서한 적공의 열성은 운집한 다수의 응모자로서 그대로 나타난 바 엄선을 마쳐 ○명의 장정이 입영하게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영예의 입대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할 예정이라 하는데 동 해병대에서는 지방유지 일동의 다수 참석으로 입대하는 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주시기 바란다고 한다. 모슬포 1. 일시 : 1950년 8월 5일 오전 10시 1. 장소 : 모슬포부대 영정(營庭)/ 제주읍 1. 일시 : 1950년 8월 6일 오전 10시 1. 장소 :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제주신보 1950년 8월 5일

‘계엄실시에 관한 포고(제9호)/1. 등화관제에 관하여/계엄령 실시 조항 중 등화관제는 차(此)를 해제함 2. 도내 여행에 관하여/목하 실시하고 있는 도민의 도내 여행 제한을 해제함. 따라서 여행증명서의 발급이 필요치 않음. 단 양민증 및 신분증명서를 소지하지 않는 자와 도외 여행에 관하여서는 종전과 여함 3.  부칙/본 포고는 1950년 8월 29일 15:00시부터 기 효력을 발생함 1950년 8월 29일 제주도지구계엄사령관 해군 대령 신현준(申鉉俊)’-제주신보 1950년 8월 30일  

1949년 4월 15일 해병대는 기간장병 80명과 해군13기 가입대 상태에서 모집한 해병 제1기생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13기생이 가입대로 들어와 있는 청소년 1,600명 중 60%가 해병대를 지원했다. 신현준은 초대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다.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고, 신현준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 하사관 54명, 병 300명이었다. 1949년 8월 1일 장교와 하사관을 해군에서 증원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2기로 특별 모병하여‚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증편되었다.  

1949년 7월 15일 김용주(金龍周) 중령이 이끄는 ‘독립 제1대대’가 제주로 이동해 2연대의 임무를 이어받았다. 독립대대는 장교들을 제주여중, 제주중학교 등 남녀 중등학교에 배치해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힌 채 각 기관에 잠입시켜 함정을 팠다. 제주비행장 서쪽에 굴을 파 잡은 것을 처치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을 했다. 더욱 문제는 제주도의 계엄령이 1948년 12월 31일로 해제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지속시켜 왔다는 점이다. 김용주는 자신을 가리켜 ‘계엄사령관’이라고 표현했다. 독립대대는 1949년 12월 27일 약 5개월간의 주둔을 마치고 제주에서 철수했다.

독립대대가 철수함에 따라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가 제주에 도착했다. 물론 사령관은 신현준 대령이다. 1200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해병대는 사령부만 제주읍에 두고,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모슬포에 주둔시켰다. 신현준은 1950년 1월 17일 해군 총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4‧3사건 등 공비주동자는 대개 섬 외로 도망하고 현재 한라산에 잠복 중인 공비는 주모자들의 모략선전에 넘어간 자이다. 도민은 대개가 공비들과 혈연관계를 가진 탓으로 과거 군에 대한 두려움에서 공포와 원한을 그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며 당시의 상황을 인식했다. 해병대사령부는 1950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제1차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해병전투사'는 제1차 토벌전에서, △2월 5일과 6일, 돌오름 부근에서 8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 △3월 10일, 중문면 881고지에서 무장대 야전병원을 기습해 병원장 등을 사살, △3월 하순경, 한대오름 부근에서 무장대 회합 장소를 기습해 7명을 사살, △3월 15일, 1394고지에서 무장대 아지트를 기습해 1명 사살하고 3명을 부상시킴, △3월 17일, 1394고지와 오백장군 지대에서 무장대 아지트를 기습하여 2명 사살, △3월 22일, 돌오름 서남쪽 500m 지점에서 무장대와 교전해 격퇴, △5월 20일, 토벌대 본부를 쌀오름으로 옮겨 정글 지대를 수색 등의  결과를 소개했다. 

1950년 전반기의 해병대 작전 때도 소규모의 교전은 있었지만 무장대의 습격은 없었다. 잔존 무장대는 60여 명 정도. 그러다가 1950년 7월 25일 중문면 하원리를 습격해 민가 99동을 불태웠는데, 이것이 전쟁발발 후 무장대의 첫 공격이었다. 김의봉을 중심으로 한 부대는 조천면 농촌지대에 침투하여 조국해방전선에 단결‧투쟁하여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는 정치사업을 전개했다. 무장대들은 북한인민군들이 곧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지속적인 습격을 하였고, 좌익계 민간인들은 제주읍을 비롯하여 각 면 단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여 무장대를 지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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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은 영남 일부와 제주도뿐이었다. 7월 초순경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신현준 사령관은 도내 유지들에게 후방에 있는 젊은이들이 참여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제주청년들은 앞 다투어 해병대에 지원하였다. 8월 5일 제3기생으로 1,500여명, 8월 30일 제4기생으로 1,500여명(여성해병 126명 포함)이 입대하였다. 이 3천여 명 해병용사들은 해병대사령부와 함께 9월 1일 제주항을 떠나 9월 15일 인천상룩, 9월 27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급속히 남하하면서 1950년 12월부터 피난민이 제주도에 몰려들어 그 수가 격증하자 무장대들은 종전의 소극적인 행동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무장대들이 자주 출몰함으로써 제주도 지역의 안정이 요망되자 군은 무장대 토벌목적으로 1개 중대 규모의 해병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1951년 1월 14일 출동한 해병대는 약간의 경찰전투대를 지원받아 4개 소대를 혼합 편성하였는데 해병대가 주력이었고, 토벌대의 지휘관은 통영작전에서 공을 세운 권석기 해병 중위가 맡았다.

해병대는 지리산과 제주도의 공비 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6·25전쟁 중에도 수많은 작전과 전투를 통해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의 영원불멸한 해병대 전통을 수립했다. 신현준은 1953년 해병대 사령관 임기를 마친 뒤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여단(현 해병대 제1상륙사단)의 초대 여단장을 맡았다. 국방부 차관보를 거친 뒤 1961년 해병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이후 초대 모로코 대사와 초대 바티칸 대사를 지냈다.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도 역임했다. 만주군 장교 근무 경력으로 인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 어획 특허에 관하여 1) 여하한 자를 막론하고 본도 3마일(哩) 이내 해역에서 어렵을 □□하는 자는 □허□ 출원시의 일체 서류의 등본 또는 사본을 첨부한 어렵인허원을 계엄사령관에게 제출하여 인허를 받아야 한다. 2) 본도에 거주하는 자 또는 본도에 선적을 둔 선박으로서 어렵을 기도하는 자는 해군작전참모실에서 발행하는 양식 제□호에 의한 특허원을 계엄사령관에게 제출하여 특허를 얻어야 한다. 3) 전항 특허자는 어렵에 있어서 좌의 각항을 엄수하여야 한다. 가. 어렵구역은 본도 3마일(□해) 이내에서 실시할 것, 나. 출어시에는 가능한 한 선단을 조직할 것, 다. 출입항시에는 해군작전참모실에서 발행하는 양식 제2호와 여한 출입항계를 제출하는 동시에 소관 경찰관서의 임검을 받을 것,  라. 어렵시간은 별도 지시가 없는 한 06:00시부터 20:00시까지로 할 것, 마. 출어선박의 표식은 좌우 양현(兩舷) 또는 공중에서 목견(目見)하기 용이한 장소에 태극기를 도시(圖示)할 것, 4) 선단에는 청방(靑防)대원 2명을 승선시켜 감시케 함  5) 전 각항을 준수치 않거나 어렵을 기화로 하여 이적행위를 하는 자는 상당 전시법규에 의하여 엄벌에 처함 2. 부칙, 본 포고는 1950년 8월 28일 10시부터 효력을 발생함 1950년 8월 28일 제주도지구계엄사령관 해군 대령 신현준(申鉉俊)’-제주신보 1950년 8월 30일

한국전쟁과 예비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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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당시 해병대 전차중대.
‘【3일 VOA】어제 제주도서 헬렌 소장은 제주도에서의 공산군 포로수용소 소동은 5,000명 이상의 중공군 포로들이 대거 탈출하려는 공작의 일부라고 언명하였다. 헬렌 소장은 56명의 사망자를 낸 이 포로소동의 조사단장이다. 5,000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대거 탈출공작을 기도(企圖)하고서 제주도 산악지대의 공산 게릴라와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그는 말하였다. 이 중공포로 폭동은 중공정권 집정(執政) 제3주년 기념일인 지난 수요일에 일어난 것으로 포로들은 임시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서 UN군 감시병에 공격해 왔던 것이다. (USIS)’-제주신보 1952년 10월 4일

‘기보(旣報)한 바와 같이 제주도에서 1일 공산군 포로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제7막사에 돌입한 미 보병대와 공산포로간의 충돌로 말미암아 중공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같은 소요사건에 관하여 유엔 포로사령부는 아래와 같이 그 전모를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제3포로수용소 제7막사에 수용되어 있는 제주도의 중공포로들이 야기시킨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엔 보병대가 거제도에서 공산포로들의 반항을 무찌른 이래 가장 비극적인 유혈극이었다. 공산포로들은 종전에 거제도에서 행한 바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며 지난 6월 이래 처음으로 공산 적기를 올렸으며 동(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돌입한 유엔군 보병대에 대하여 당돌하게도 투석을 하고 가시철망을 가지고 유엔 보병대와 싸웠다. 이러한 공공연한 저항은 소규모의 시위가 행하여진 일은 있었으나 처음 보는 일이다. 70명 가량의 유엔군 2개 소대는 동(同) 포로 두목이 시위중지 명령을 거부하였으므로 드디어 제7막사 안으로 돌입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안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공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하게된 것이다.” 한편 유엔군 포로사령부는 공산포로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총기를 사용하였는지 그 여부에 관해서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사한 폭동은 중공의 소위 조국해방 3주년 기념에서 자극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조선일보 1952년 10월 4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민족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비참하며 많은 인명이 살상된 전쟁이 시작되었다.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 22일에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되었고, 1954년 8월에 폐쇄될 때까지 3년 반 동안 많은 신병을 양성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6월부터 포로들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분리하여 분산 수용하였는데, 북한군 포로는 육지에,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수용하였다. 중공군 포로 중 본국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5,809명은 제주비행장에, 송환을 원하지 않는 ‘반공포로’ 14,314명은 모슬포비행장에 수용하였다. 친공포로가 1952년 10월 1일 중공 정부 수립 3주년을 맞이하여 행사를 한 후 시위를 하였다. 포로수용소를 경비하던 미군 2개소대가 시위하는 포로들을 진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살되고 113명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였다. 이 지시문은 제주도경찰국장에게 하달되었는데,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과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서 경찰‧검찰‧법원 조직 등은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되었고, 이에 따라 신현준 제주도지구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도 즉각 요시찰인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루어졌다. 예비검속 인원은 경찰 공문서에는 820명이라고 적혀 있고, 미국 대사관 직원의 보고서에는 경찰이 국민보도연맹 임원 700명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된 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이루어졌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된 현장은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었지만, 나머지 제주‧서귀포경찰서에 검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희생 일시 및 장소 등 당시 상황은 철저히 기밀로 처리되었다.

1950년 9월이 되자 제주지역에서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은 정지되었다. 당국의 심사 결과, 9월 18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153명이 석방되었다. 제2차로 제주경찰서에 수용 중이던 48명의 예비검속자에 대한 석방도 이루어졌다. 서귀포경찰서에서는 9월 17일 전원 석방하였다. 모슬포경찰서에서는 9월 18일 이전에 전체 검속자 344명 중에서 90명을 석방하였다.

한편 1950년 8월 법원장‧검사장‧제주읍장 및 변호사‧사업가‧교육자 등 유지급 인사 16명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로 연행되는 소위 ‘유지사건’이 발생했다. 계엄사는 8월 8~9일 이들을 전격 구속함으로써 제주지역 사회는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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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공비 토벌작전 기념촬영.

‘예비검속자 석방에 대하여서는 기위 지상에 발표된 바와 같은데 그간 사찰 관계당국의 엄중한 심사를 거듭하여 오던 차 예비검속자 153명이 작 18일 하오 7시 제주경찰서에서 CIC 대장, 계엄사령부 정보참모, 경찰국 사찰과장 및 각 관공서장 및 지방유지 다수 출석하에 간단한 석방식을 거행하였는데 국민의례가 끝난 다음 각 사찰관계자 대표의 훈시, 국민회 회장의 격려사, 석방자 대표의 열렬한 개성(改省)의 선서, 마지막으로 국민회 회장의 선창으로 만세를 삼창 폐회하였는데 특히 동 석상에서 제주경찰서장은 진정한 대한의 아들과 딸이 되어 충성을 다하라는 요지의 열렬한 격려의 훈시가 있었다.’-제주신보 1950년 9월 20일

양민학살 고발 제1호, 제2호

‘○… 4․3유지사건 등 양민학살 폭로문제가 대두된 뒤 처음으로 청년들 40여 명이 모슬포에서 궐기했다는 지방소식! ‘아…슬프다 특공대 참살’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청년들은 외치고 부녀자들은 목놓아 울었다고….○… 이 말을 전해들은 본도 치안책임자 이성근(李聖根)군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고 결의한데 대해서는 감사하나 흥분되기 쉬운 일들이 발생되지 않고 출신 민의원들로 하여금 중앙에 반영되었으면 좋겠다”고 심회를 피력. 그 당시(양민학살할 때) 공포에 떨던 본도의 부녀자들은 “총칼의 위협에 눌려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전해들은 원택연 검사장 ‘신화같은 이야기’라고 놀래었다. 어쨌든 밝혀지긴 해야 할 본도의 사건들 … 냉정과 이성에서 판갈이 해야 될 터인데…. ○… 모슬포에서 일어난 300여 명의 민중들의 요구는 국회의장에게 메시지로 국회조사단을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평화적으로 이성에 의해서 정연한 질서로 호소되었는데 한 장의 유리창도 한 사람의 부상도 없이 있어진 그 데모는 보복과 파괴 없는 진정한 민의….지적된 사건을 소개하면 1948년 12월 11일의 특공대 참살, 또 1950년 7월 7일의 양민집단학살! 구체적이고 뚜렷한 대상.(후략)’-제주신보 1960년 5월 29일

‘검찰에는 일가족 10명의 양민학살 고발사건을 위시로 당시 본도 해병대사령관으로 있던 신현준(申鉉俊)중장을 피소(被訴)로 한 사건이 각각 제기되고 있는데 동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지검 김순재(金淳栽)검사는 13일 전기(前記) 가족몰살 사건의 고발인에 대한 고발의 내용 진상조사에 착수함으로써 그 처결 귀추에 이목을 쏠리게 하고 있다. 김 검사는 이보다 앞서 서귀읍 거주의 강희철(康熙喆)씨가 고발한 신현준 중장의 피소사건에 대한 피해자 가족과 증인 신문 등을 행하는 한편, 신중장이 현역군인 여부를 확인하고자 목하 군 당국에 조회 중에 있는데 신 중장에 대한 군부로부터의 정식 회시는 없으나 국방부에 소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傳聞)되는 바 동 사건은 불일 동 회첩의 접수와 함께 군 수사당국으로 이관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13일 고발인 소환 조사에 착수한 일가 10명의 몰살사건은 외도동에서 생후 10일 영아에 이르기까지 일가 4대를 몰살했던 어마어마한 내용인 것으로 검찰수사는 이제 피해자 가족측의 피해상황조사와 그에 따른 증인 신문 등 본격적 수사에로 들어갈 터이라는데 동 사건은 작년 6월 23일 본사에서 접수한 바 있는 양민학살진상규명신고서 1,259통 가운데서 고발요건이 구비된 전기 사건을 본사 전무 신두방씨가 고발제기했던 것이다.’-제주신보 1961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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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서 지원입대한 해병대 여자의용군들의 모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진압작전과 민심수습이라는 두 가지 임무 중 민심수습에는 실패했다.  특히 6‧25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자 총살로 많은 인명을 불법 살해했고, 흔히 ‘유지사건’이라 불리는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 사건’을 조작해 제주도내 유력인사들을 고문했다.

또한 민폐를 끼치는 과정에서 당시 강성모 서귀면장을 불법적으로 처형하기도 했다. 이에 관해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이던 김호겸은 “강 면장은 소위 ‘괘씸죄’로 희생된 것이다. 해병대는 자신들의 부식 마련을 위해 면장에게 ‘한 시간 내로 소 몇 마리, 고사리 몇 백 관을 준비하라’는 식으로 강요하며 민폐를 끼쳤다. 그런데 강 면장이 이에 호락호락 순응하지 않자 앙심을 품고 죽인 것이다”고 증언했다. 

강성모의 유족들은 4‧19 혁명이 일어나자 신현준을 고발했다. 고발장은 1960년 7월 1일 ‘양민학살 고발’ 제2호로 제주지검에 접수됐다. 유족들은 고발장에서 “학살 원인은 고발인의 부친 강성모가 서귀면장 당시 고사리 캐기 등으로 군에서 민간인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이의 시정을 건의한 것이 당시 군의 비위를 거슬려 6‧25사변이 돌발하자 전기와 같이 시체마저 찾아볼 수 없게 학살시켜 버렸다”고 밝혔다.

이에 고발장을 접수한 제주지검은 피해자 가족과 증인 신문 등을 행하는 한편 신현준에 대해 군 당국에 조회를 하는 등 수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그러나 곧 5‧16 군사정변이 벌어져 진상규명 작업은 묻히고 말았다

‘양민학살 고발 제2호가 1일 당지 지검에 접수되었다. 신현준(申鉉俊) 예비역 해병중장 외 1명을 상대로 서귀포 거주 강희철(康熙喆)씨가 고발한 동 고발장에 의하면 고발인의 부친 강성모(康成謨․당시 44세)씨는 6․25발생 직후인 1950년 7월 하순경 전기 피고발인 신현준씨가 당지 해병대사령관으로 있을 때 그 부하로 하여 체포당해 갔는데 행방도 모르고 시체조차 발견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학살원인은 고발인의 부친 강성모씨가 서귀면장 당시 고사리 캐기 등으로 군에서 민간인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이의 시정을 건의한 것이 당시 군의비위를 거슬려 6․25사변이 돌발하자 전기와 같이 시체마저 찾아볼 수 없게 학살시켜 버렸으니 이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신보 1960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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