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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의 무덤을 지키고 선 수선화

김연미 33383331@hanmail.net 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11:52   0면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9) 금잔옥대에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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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선화. ⓒ 김연미

수선화 피어있다. 옥색 받침에 금색 잔 모양의 이중 꽃이 돌담 아래서 군락을 이루었다. 화려했던 단풍은 짧은 가을만큼 서둘러 떨어지고, 어디를 둘러봐도 상실과 결핍의 허기만 가득한, 감출 수도, 감출 것도 없는, 본색이 다 드러나는 겨울. 확인되지 않았을 때 가지는 실낱같은 희망도 이 겨울에는 바닥을 내보이는데, 어쩌자고 수선화 저 홀로 피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인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터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 돌담 아래서 그들의 무리는 긴 행렬을 이룬다. 광화문 촛불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일렁인다. 그 일렁임은 바람이 세면 셀수록 더 강렬하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절대 꺼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인가. 바람보다 더 빨리 누워도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나 다음에 불어 닥칠 바람을 대비한다. 제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으로 한꺼번에 움직이는 꽃대들. 일사분란한 자유. 그 험한 바람 앞에서도 그들의 몸짓과 표정은 맑고 아름답다.

가만히 그들의 일렁임을 보노라면 스산했던 가슴에 조금씩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얼음기 꽉 찼던 감정들이 데워진 피를 받아 풀리고 흐르고 돌아간다. 바람에 일렁이는 꽃잎들과 괘를 이루는 가슴. 그 일렁임에서 함성을 듣는다.

몇 해 전, 북촌 너븐숭이 박물관 옆 애기무덤이 있는 곳에서 수선화를 본 적이 있다. 물론 수선화야 이맘때면 제주도 어느 돌담 아래,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유독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4.3민중항쟁 당시 북촌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던 너븐숭이 빌레 위에, 그 때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아기의 무덤들이 아기들 장난감처럼 종종종 놓여 있고, 그 거짓말 같은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 채 무덤을 지키고 서 있는 수선화.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도 금잔옥대의 꽃을 피우며 아이들의 울음을 혼자 달래고 있었다. 아기 무덤가에 환하게 핀 꽃, 이 어울리지 않은 역설에 한동안 멍한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수선화는 너븐숭이 박물관에 관장으로 일하셨던 분이 지인의 마당에 심어져 있던 수선화를 캐다가 하나씩 심어놓은 것이라 했다. 바람만 드나드는 무덤가에 무엇이든 놓아주고 싶었던 관장님의 마음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말을 할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가슴으로 수선화 알뿌리 몇 개 캐어다 흙 한 줌 품지 못한 빌레 땅을 일구며 심었던 그 마음을...

수선화 곱게 피는 것은 무덤 속 어린 영혼들에게 금잔옥대의 술을 바치고, 누구라도 이 자리에선 그렇게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라는 그 관장님의 절절한 소망이었지 않았을까. 누구든 너븐숭이 박물관에 가면 애기무덤에 먼저 들러 수선화가 건네는 금잔옥대에 술 한 잔 따라 무덤에 건네야 한다. 해맑게 웃는 아기들이 그 술 받아 마실지, 장난처럼 잔을 엎지를지는 미리 생각하지 말자. 수선화가 건네는 두 번째 잔을 받들어 우리도 눈물 같은 술 한 잔 마시고 오자. 그러다 보면 응어리졌던 울음의 뭉치들이 어느 순간 봄 햇살처럼 풀리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함성 가득 품은 수선화가 다시 바람에 일렁인다. 감상에 빠져드는 나약한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 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낙엽들이 아무데나 끼어들어 시야를 흐리고,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 추위에 몸을 더 움츠린다. 그 가운데 푸르게 푸르게 긴 행렬을 지어 움직이는 수선화 무리가 아름답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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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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