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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인심 나고 길 위에서 흥겹다

오한숙희 kyou0079@naver.com 2017년 03월 15일 수요일 13:19   0면

[일본 규슈올레서 만난 제주] ③ 올레로 마음을 잇다 / 오한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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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바닥에는 누구나 끼어앉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길도 그렇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맨 바닥의 힘

해가 지고 버스는 커다란 목조주택 앞에 섰다. 규슈올레 19번째 코스, 미야마 기요미즈야마(淸水山) 코스가 개장되는 전야 만찬 모임장, 어둠속에 환영 현수막을 든 사람들이 우리를 맞았다. 신발을 벗고 삐꺽대는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다다미방에 네 줄로 밥상이 길게 이어져 있고 방석이 촘촘히 놓여있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갔을 때 여관에서 차려주던 밥상풍경이 떠올랐다. 

자리는 일본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마주 보게 배정돼 있었다. 일본말을 모르는 내가 한국말을 모를 사람과 대면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 대략난감한 상황. 관광일본어 핸드북이라도 들고 올 걸 후회막급한데 때마침 연세가 꽤 있어 뵈는 일본 남자분이 들어오시는가 싶더니 딱 내 앞에 앉으신다, 소화 잘 되긴 틀렸구나. 공식만찬행사가 시작되고 시장과 시의장의 인사말을 지나,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코스는 단번에 올레로 인증 받은 곳입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훌륭한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길도 걷기 좋은 길로 지키자면 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사장의 말이 통역되자마자 내 앞의 파트너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더니 통역 내내 깊고도 깊은 공감의 표시를 쉬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한 템포 늦은 통역이 그를 이 마을 걷기협회 회장으로 코스 개발에 1등 공신이라고 소개했다.

길에 서면 우연히 만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jpg
▲ 길에 서면 우연히 만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앞으로 주머니에 정원가위를 챙겨 다니겠다”

그의 말에 웃음이 빵 터지면서 딱딱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녹아버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완고한 노인으로 뵈던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인사를 겸해 코스를 소개하는 안내지도를 펴보였다. 그가 밥상위로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정적인지, 분명히 일본말로 하는 데도 다 알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감정의 선은 언어의 장벽을 관통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무모해졌다. 올레정신이 무엇인가. 길이 난 마을과 그 마을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아까부터 눈여겨 보았던 문간 쪽 맨 뒤에 앉은 세 여자에게 돌진해 다가갔다. 양복 입은 남자들이 가득한 이 공간의 가장 모서리에 자리잡은 이 세 ‘아주머니’가 왠지 남 같지 않았다.  

나는 경상도에서 일본으로 시집온 혼조상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오루레 길은 중년 여자들이 꼭 걸어야합니다. 가족과 살림에 지친 마음을 자연의 길에서 힐링하기 위해 한국에서도 제주올레에 여자들이 가족을 두고 혼자 걸으러 많이 옵니다”

혼조상의 통역은 마음까지 전달하는 빙의수준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그들은 통역이 끝나기도 전부터 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조상이 자리를 떠난 다음에도 자신들이 당겨앉아 나를 끼워 앉혀주었다. 

그 중 한 여성이 내 손을 잡으며 “내일 점심식사 때 내가 봉사를 하니 그때 보자”고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벤또’와 ‘싸비스’를 힘주어 반복하는데 어찌 못 알아 들으랴. 아, 이렇게 해서 국제결혼도 되는 거구나.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옮겨 끼어 앉으며 어느새 시끌벅적 국수잔치집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전날 이즈미 코스도 만찬이 있었지만 그곳에선 이런 화합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왜 그랬지? 거긴 바닥이 아니었다. 호텔룸에 테이블마다 몇 명씩 의자에 나눠 앉았다. 자기 의자를 들고 가지 않는 한 다른 테이블에 끼어 앉을 수가 없었다. 

맨바닥의 힘, 누구라도 끼어 앉을 수 있게 품는 힘이 맨바닥에 있었다. 길도 그런 것이리라. 길을 내면 걸으러 오는 모든 사람을 품게 되고, 걷다보면 사람들은 그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품게 된다. 길은 결국 지구의 맨 바닥이고 길 위에서 모든 생명체는 서로를 품을 수 있는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 길에서 보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소유가 아닌 소통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행복한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더니 잠자리에 누우니 하루가 참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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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딱고개에 늘어선 울울창창 대나무들, 평생볼 대나무를 이 곳에서 다 보았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다짜고짜 대나무숲, 여신의 휴식처

다음날 아침, 개장 행사장은 우리네 오일장 분위기였다. 장소가 마을 공터인데다가 주민들이 따뜻한 녹차와 팥죽, 사탕과 센베, 등을 쟁반에 받쳐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맛난 것을 먹으며 주위사람들과  들떠서 웃고 이야기하는 풍경이 장날의 흥겨움을 담은 한 폭의 민화 같았다. 길 위에서 인심 나고 길 위에서 흥겨운 이 현상을 무어라 해석해야 할까. 호모워킹쿠스?

추운 날씨에도 반바지 원아복 차림으로 축하공연에 온 동네 유아원 꼬마들. 안 춥니? 라고 묻는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못할테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보는 게 어리둥절한 눈치다.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무조건 환호 하는 어른들, 이 아이들에게 오루레는 유년의 기억으로 새겨질 것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오루레 개장행사에서 춤추고 노래했었지’라고 회상할 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 죽고 없을 수도 있겠지, 인생이 그리 긴 게 아냐,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이어지는 생각들, 길은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기습적으로 사람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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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장행사를 축하하러 온 아이들, 오레루는 이들 유년의 기억으로 깊이 새겨질 것이다. /사진 제공=강올레 ⓒ 제주의소리

드디어 출발, 코스로 향하는 마을 길은 사람에 밀려 느릿느릿 살짝 지루했다. 그런데 웬걸, 찻길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갑자기 산길이 시작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깔딱길, 그 양 옆으로 쭉쭉 뻗어 올라간 아름진 대나무. 세상에, 예고편도 없이 다짜고짜 이렇게 울울창창한 대나무숲이 나타나다니.

와아!, 대나무숲에 감탄하다가 아이고 다리야, 깔딱길에 신음하다가 다시 대나무에 감탄하기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올라간다. 대나무들도 놀랐으리라, 고요하던 자신들의 거주지에 갑자기 인간들이 떼 지어 나타났으니.  

평생 볼 대나무를 다 본 듯한 충족감,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대리만족,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찝찝하지 않은 것은 대나무 샤워 덕이었다. 정상에 오르니 나무로 지은 망루는 비행기인 듯 먼 동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코스가 단번에 올레인증을 받았다는 게 이해가 되네요”

전문가 같아 뵈는 사진기를 든 사람이 땀을 닦으며 말하는데, 그 옆에 설명판이 있다. 여신이 출산을 하고 이 산에서 목욕을 하며 산후조리를 했단다. 

여신이라, 그러자 이유미씨 얼굴이 떠올랐다. 규슈올레를 처음 시작한 재일교포여성,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규슈관광추진기구에 취업한 그는 제주올레의 존재를 아는 순간, 이것이 여행의 새바람임을 직감하고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 안은주 사무국장을 일본으로 초청, 규슈올레의 길을 텄다. 규슈올레 5년의 역사는 그가 두 아이를 업고 다닌 어머니의 길. 그 역시 출산 여신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여신의 땅에 여성이 길을 냈다는 건데, 이 또한 오루레와 올레가 닮은 꼴이네. 제주올레도 여자가 냈고 한라산에는 설문대할망이 계시니. 

대나무숲 여신이 말할 것 같다
“장하다, 길을 낳은 여인들이여, 대나무 샤워하라”

길을 낳은 사람에게만이랴, 대나무는 길을 사랑하는 모두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피톤치트를 쏟아부어줬을 것이다. 4군자의 지조까지 담긴 싱싱한 에너지를 말이다. / 오한숙희 <4편 16일 이어집니다>

▲ 여성학자 오한숙희.

오한숙희는? 195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딸들에게 희망을>, <그래, 수다로 풀자>, <부부? 살어? 말어?>, <사는 게 참 좋다> 등을 펴냈다. 

여성학자이면서 방송인, 에세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 서귀포로 이주한 지 3년차다. 제주문화방송 TV <스토리 공감>을 진행하고 있으며 제주도 양성평등위원. 서귀포다움을 위한 건축포럼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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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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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몽생이 2017-03-15 22:41:50    
제주의 마을 안길 올레는 아름다운 제주사람이 자연스럽게 길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를 휘돌아 감는 걷는 길 올레 또한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즈미코스, 오루레라 불리는 이길은 누가 만들어야 할까요?
자연이 인간에게 이렇게 길을 내주면 고맙고도 곱게 잘 써야 합니다. "아름다운 길도 걷기 좋은 길로 지키자면 늘 손길이 필요합니다" 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연위에 있다는 생각이지요.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도 될만큼 자연을 위한 길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이제는 길을 만드는 것도 뒤돌아 볼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1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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