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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익어가는 여름이면 떠오르는...

김정숙 kimjs1018@hanmail.net 2017년 06월 17일 토요일 11:24   0면

<제주 밥상 이야기> (36) 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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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역. ⓒ 김정숙

볕살이 뜨겁다. 어느새 씰룩씰룩 자란 새싹들이 싱그러운 그늘을 만들어낸다. 이런 그늘의 맛은 상록수가 만드는 그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상록수가 만드는 촘촘한 그늘이 부모님께 얻어먹는 맛이라면 나풀나풀 쏟아낸 햇가지가 볕살 흩뿌리며 만들어 내는 그늘은 자식들이 주는 선물 같다.

어느 그늘이건 여름날 그늘이 존재 한다는 건 축복이다. 특히나 바깥일을 하다가 찾아든 그늘 맛은 자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꿀 보다 단 물을 맛 볼 수 있고, 가까이 하기엔 다소 껄끄러운 흙에도 벌렁 등을 붙이고, 그늘 한 숨 들이 키고 나서야 쨍쨍한 여름 하늘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급히 마신 물이 전신으로 골고루 퍼질 즈음 개역을 한 사발 먹으면 다시 볕살 아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3, 40년 전 여름 밭일을 하던 풍경이다.

보리, 유채는 한꺼번에 익었다. 사람 손으로 그걸 다 거두어 들였던 초여름의 제주는 극한 농번기였다. 학교마다 농번기 방학을 해서 아이들도 일손을 거들었다. 수확시기를 놓친 보리는 대궁이 부서지면서 고부라져 일을 더디게 했고, 유채도 선 채로 꼬투리를 터뜨렸다. 들녘마다 겉과 속을 태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수확을 마쳐야 했다. 보리나 유채는 젖으면 싹이 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거두어 들여야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이다. 낮이 뜨거워 보리, 유채가 부서질 때는 달밤에도 일을 했다. 그야말로 야근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이런 부모 속도 모르고 아이들은 보리 익기 시작하면 개역타령을 했다. 비오는 날은 방앗간마다 개역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다보니 어린아이들은 비오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웃픈 현실이었다.

개역은 도정하지 않은 햇보리를 볶아서 빻은 가루 즉 보리미숫가루다. 소금과 설탕대신 단맛을 내는 당원이라는 걸 넣어서 빻는다. 적당히 달콤한 개역은 간식이면서 주전부리 같은 것이었다.

물에 타서 음료수처럼 마시기도 하고 죽처럼 되게 타서 떠먹기도 하고, 그릇에 가루를 반쯤 담고 위로 물을 살며시 부어 숟가락으로 살살 걷으면 물에 싸인 가루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다 식은 밥이 있으면 비벼 먹기도 했다. 개역에 굴린 보리밥은 달고 구수했다. 열무김치 곁들여 먹으면 참 맛있었다.

보리는 열을 내려주는 여름음식이다. 기력이 떨어져 입맛이 없을 때도 개역 한 사발 들이키면서 죽을힘을 다해 그 여름 바쁜 고비를 넘기곤 했다. 밥 외에 뭔가 먹을 게 있는 집은 좋았다. 일 나가고 아무도 없는 집이라도 개역이 있는 날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가곤 했다.

삶이 나아져 요즘은 보리와 함께 콩이며, 현미, 쑥 등 좋은 재료로 궁합을 맞추어 미숫가루를 만든다. 맛으로 먹기보다는 건강보조식품이나 추억으로 먹는다. 보리, 유채를 대신한 소득 작물이 늘어나고 수확이나 파종이 기계화 되면서 그 때 같은 여름 농번기는 지역이나 농가별로 사정이 달라졌다.

개역을 대신할 시원한 음료며 간식거리도 넘쳐난다. ‘개역’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해져 간다. 며칠씩 기다리는 맛도 없고, 먹거리의 계절도 사라져 가는 터에 개역은 무슨 개역. 하지만 여름의 초입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보면 개역이 그립다. / 김정숙(시인)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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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시인은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출신이다.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으로 <나도바람꽃>을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여년 동안 제주도농업기술원에서 일하다 2016년 2월 명퇴를 하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 ‘제주 밥상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식문화를 감칠맛 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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