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상과 만나다] 영화는 '스토리의 맥(脈)'만 제시한다

채우면 채울수록 빈곤한 영화가 있습니다. 반대로 비우면 비울수록 꽉차 보이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많은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내용들이 구석구석 들어차 있지만 정작 졸음만 쏟아지던 기억. 반면 대사가 별로 없고, 카메라는 움직이지도 않은채 인물과 배경만 비추지만 가슴속에는 감동이 꽉찼던 짜릿한 기분들.

최근 제주에서도 선보였던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여백’으로 관객들의 몸과 마음을 온갖 감동과 감정으로 꽉차게 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카메라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장엄한 풍광과 두 카우보이의 사랑과 고백, 이별의 일상을 덤덤히 비춥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비우고 또 비웁니다. 영화는 단지 스토리의 맥만 보여줄 뿐입니다. 비워진 부분은 관객들의 온갖 상상과 감정, 감동, 사랑에 대한 가치관, 기억 등으로 채워집니다.

# 4.3 다룬 영화, 무조건 담지 말길

‘역사’를 다룬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채우는데 신경쓰다보니 정작 관객에게 말하고픈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를 꽤 봅니다.

▲ 영화 '뮌헨'의 한 장면.

1972년 뮌헨올림픽 인질 사건을 소재로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은 ‘폭력의 악순환’ ‘폭력의 보복이 거듭되는 현대사회의 모순’등을 나름대로 잘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폭탄테러 장면이나 스펙터클하게 진행되는 총격장면으로 관객의 ‘눈’은 가려집니다. 관객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들을 쫒다보니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국 뉴욕의 ‘쌍둥이 빌딩’(9.11 테러때 폭격당한 건물)의 의미를 놓치고 맙니다.

영화는 ‘폭력’의 문제점을 폭로하지만 정작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을 제공하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주목하게 만드는 자기모순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을 영화로 다루는 시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4.3을 어떤 형식, 어떤 내용으로 다루느냐는 작가의 뜻과 의지에 달렸지만 채워넣어 빈곤해지는 영화는 4.3 역사 자체를 빈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여백’으로 채워진 영화는 관객에게 보이지는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을 줍니다. 더욱 알차고 풍성한 내용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4.3을 내세워 채우는데 신경쓰다보면 당초 목적이던 ‘4.3의 공론화’라든지 ‘4.3의 대중화’는 ‘4.3의 상업화’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채움에도 철학이 있고, 비움에도 철학이 있는 법. 영화 속 채움과 비움이 균형있게 자리잡아야 영화 내내 4.3의 본질을 잊지 않고 관객들과 호흡하고 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여백의 힘’ 일상적인 교육부터

결국 귀결되는 것은 ‘4.3’과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공론화와 교육입니다.

▲ 4.3 장편 극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 서북청년단이 학대하는 장면.
4.3을 갖고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로 만들어 보겠다고, 눈물, 콧물 짜내는 신파극을 만들어 보겠다고(물론 이런 시도가 가치 없는 일은 아닙니다) 하는 일도 우선 4.3을 다루는 가치관, 주관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4.3과 영화가 교육현장에서 유쾌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는 상황은 4.3 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는 토양을 제공합니다.

여백도 나름대로 여백을 채울만한 것들이 넘쳐나야 옮겨담을 수 있습니다. 4.3에 대한 지적욕구와 다양한 해석, 토론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4.3 영화는 본질은 외면된 채 역사적 사실을 채우기도 버거운 시도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바람을 갖고 오늘도 기원합니다. 4.3과 영상이 어우러져 교육현장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단단한 지적, 제작 토양위에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4.3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오늘도 외쳐봅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도 제주를 사랑하고 4.3을 스크린으로 옮기기 위해 묵묵히 땀흘리는 이들을 위해. 파이팅!
[제주씨네아일랜드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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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씨네아일랜드’는 제주도내 영상인력을 양성하고 올바른 영상문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내 민간 영상 단체입니다. 11년 역사동안 ‘트멍영화제’를 비롯, 지난해 이름이 바뀐 ‘제주영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고, 영화관련 강좌, 상영회 등도 지속적으로 주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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