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상)

첫 번째 글에서 영화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 대중들은 이 영화를 보러 왔는가?. 구체적으로 묻자. "왜 500만명 이상이 <추격자>를 보러 갔는가?". "제주에선 왜 5만명 가까운 도민이 이 영화를 봤는가?". 18세 이상 관람가에 유명 스타가 나오지 않은 영화가 무슨 매력이 있길래. 이미 밝혀진 살인자를 쫒는 서스펜스 장르는 한국에서 자주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낯선 장르 영화를 보여주는 일은 '모험'에 가깝다. 다행히 모험은 성공했고, 성공을 넘어 <추격자>는 2008년을 가장 뜨겁게 달군 작품으로 선정됐다.

<추격자>를 선택한 이유는 2007년 말 한국인들이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006년 제주도민들이 김태환 도지사를 선택한 이유와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본다. 물론 이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대통령, 도지사를 같은 선상에 놓은 이유는 세 가지 모두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모두 자신의 뜻대로 향유한다 해서 판타지가 현실이 되지 않음도 공통점 중 하나다. 기대와 배반심리가 동시에 깔려있다. 도지사가 김태환이고, 대통령이 이명박이라 해서 모든 도민, 국민이 김태환, 이명박처럼 될 리 만무하다. 영화 속에서 선남선녀가 운명적으로 사랑하더라도 관객이 똑같은 현실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사실을 앎에도 도민과 국민, 관객은 세 가지 모두에 번번히 기대하고 배신당한다.

관객들은 <추격자>에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그들의 현실이 어떻길래. <추격자>가 만드는 판타지가 어떻게 500만의 관객을 홀렸는가.

   
▲ 판타지 세 축…범죄자, 추격자, 공권력 <추격자>는 세 축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범죄자인 지영민(하정우 분), 추격자 엄중호(김윤석 분) 그리고 공권력이다.

삼각구도를 형성한 세 축은 상호작용하며 서사를 끌고 간다. 지영민과 엄중호는 추격하고 추격당하는 관계고, 지영민과 공권력은 진실을 숨기고 밝히려는 관계, 엄중호와 공권력은 과거 동거관계였다. 이 축에 관객이 끼어든다. 그래서 서사는 네 축으로 흘러간다. 관객은 세 축과 상호작용한다. 각자 판타지를 주입하며 서사를 늘린다.

먼저 공권력. 영화에서 경찰은 서울시장의 민심탐방을 보좌한다. 과정에서 한 상인이 시장 얼굴에 분뇨를 투척한 상황을 미리 차단 못했다. 경찰은 명예회복위해 지영민을 제물 삼는다. 영화에서 공권력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은 공권력 본질에 맞춰진 방향이 아니다. '서울시장'이라는 권력과 원활한 공생관계를 위한 대책에 맞춰진 진실 찾기다. 거기다 뻔히 피해자가 지영민 집에 잡혀 있으면서도 경찰은 우왕좌왕한다.

여기서 관객이 취하는 판타지는 공권력에 대한 경멸이다. 본질적으로 국민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공공의 힘으로 규정되는 공권력이 사권력으로 사용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자 비난이다. 이 같은 판타지는 당연하고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지영민과 엄중호에 적용되는 판타지는 의심해야 한다. 지영민은 살인자다. 지영민은 연쇄살인을 벌이나 명확한 이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살인은 섹스이자 배설, 식사행위와 같이 묘사된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한국사회 시스템 문제를 건드린다. 지영민의 등장은 곧 한국사회가 이미 범죄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이 됐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지영민의 살인동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시스템이 원인이지, 개인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서울의 밤거리. 지영민과 엄중호의 추격전은 선과 악의 정당한 사유의 추격전이라기 보다는 시스템에서 양산된 돌연변이들의 추격전 같아 징그럽게 느껴짐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관객은 지영민을 보며 이미 제주사회를 포함한 한국사회 시스템의 폐해를 절감하고 있다. 지영민의 출현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시스템에서 양산된 돌연변이인 지영민이 역공을 취하며 이 사회에 망치질을 할 때 관객들은 쾌감을 느낀다. 왜? 제주도민 대부분이 시스템의 굴레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피해와 죽음의 문턱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영민의 망치질은 왜곡된 대항 행위다. 시스템에 대한 대항은 당연하다. 하지만 관객들은 정의를 바탕으로 한 정당한 대항은 권력에 먹히지 않고 가능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차마 자신은 하지 못하지만 지영민은 하고 있는 '지영민식 대항방식'에 쾌감을 얻는다. 제주를 포함한 한국사회는 정의보다 괴물에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엄중호는?. 엄중호가 추격한 이유는 단순하다. 지영민이 엄중호의 사유재산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엄중호의 재산인 여성들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엄중호가 지영민을 추격할 이유가 없다. 지영민이 엄중호의 재산을 하나씩 없앨 때 엄중호는 발벗고 재산을 지키러 나선다. 지영민을 잡는 건 경찰이 아닌 엄중호다. 엄중호는 경찰을 그만둔지 오래다. 그가 공권력을 대신할 권리나 자격은 없다. 하지만 엄중호는 법을 초월한다. 법을 초월하면서까지 지영민을 잡고 보란듯이 재산을 지켜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제주사회 도민이 자신의 재산을 지켜줄 법을 초월한 절대자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영원불멸 보호해 줄 알았던 공권력에게서는 이미 배신당해 절망한지 오래다. 믿을 건 공권력마저 굴복시킬 절대적 힘이다. 그 힘의 형태는 다양하다. 자본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무한한 폭력일 수도 있다.

제주 관객은 영화를 통해 제주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공권력의 경멸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결책으로 공동체 복원을 외치지 않는다. 되려 자신만이 살 길이라고 외친다. 엄중호처럼 재산을 뺏어간 누군가를 끝까지 쫒아 지켜낼 절대자를 찾고 있다. 절대자를 찾기 위한 투쟁. 지금 벌어지는 한국사회를 지켜보라. 사례는 숱하게 많다.

길게 쓰지 말자 했는데. 길어져 버렸다. 거 참 짧게 쓰기 쉽지 않네. 다음회에 뵙겠다.  / 이영윤 제주대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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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사)제주대안연구공동체 주간제주동향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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