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편지(14)] 운명의 굴레 벗고 바람의 힘을 빌어

▲ 산 안개에 휩싸인 한라산 화구벽.ⓒ오희삼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환상의 섬 제주도.
이 섬의 한 가운데 1950미터의 높이로 솟아오른 산이 바로 한라산(漢拏山)입니다.
망망대해 푸른 물결 위의 작은 섬에서 제주 땅 어디에서나 한라산은 올려다 보이게 마련입니다.
아득한 수평선 일출봉 너머 떠오는 첫 햇살이 한라산 머리에 닿고 고단한 하루를 건너와 수월봉 너머로 스러지는 노을도 한라산에 마지막 입맞춤 하며 수평선으로 소멸해갑니다.
한라산은 그렇게 하늘에 맞닿아 우뚝 솟아 있어 예로부터 제주의 사람들은 한라산을 기준 삼아 방향을 가늠했고, 한라산을 비치는 해의 각도에 맞추어 시간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 철쭉꽃 주단을 딛고 솟아오른 남벽.ⓒ오희삼
이 땅에 사는 사람 또한 자연과 다르지 않아서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이 한라산이요, 노을 비끼는 저물녘 땅거미로 내려앉는 이 또한 한라산입니다.
고향 떠난 이들이 제주도가 그리울 때 가장 먼저 떠오는 얼굴 또한 한라산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땅에 뿌리를 둔 이들에게 한라산은 삶의 시원(始原)이자 종말(終末)인 것입니다.
유년 시절 가슴에 손수건 달고 선생님의 선창을 따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영이야 놀자, 철수야 놀자’ 하며 국어책의 한 구절을 암송하던 때, 매일 아침 운동장에 모여 부르던 교가의 첫 소절은 이랬습니다.
‘한라영봉 정기 받고......’
아마도 제주의 학교 거개의 교가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한라산은 상상속의 세계였고, 가 닿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습니다.

▲ 여명속의 백록담. 대한민국 최고봉인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에겐 신성의 장소여서 해마다 산정에서 하늘님께 제를 지내던 곳이었다.ⓒ오희삼
오늘의 한라산은 맘먹으면 다가설 수 있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인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백록담을 찾아듭니다.
꽃보다 더 화사한 옷을 입고 맛난 성찬을 배낭에 둘러 메고 정상에 올라 정복의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남한에서 제일 높은 곳에 섯노라는 뿌듯함에 가슴에 찌든 때를 훌훌 벗는 듯한 황홀감이 들만도 합니다.
어찌 아니 그러하겠습니까.
가릴 것 없는 가없는 하늘, 탁 트이는 시야.
멀리 바다와 하늘이 제 몸들을 섞어 어디부터 하늘이고 어디부터 바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무변대해(無邊大海)가 내 발 아래 있으니.
덧붙여 구름 비단을 깔고 솟아오른 봉우리 한복판에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연못까지 있으니 어찌 아니 그러하겠습니까.
가히 백록담에 어린 전설 속의 흰 사슴 타고 놀던 신선(神仙)이 된 기분이겠지요.
흰 사슴 대신에 승천하는 구름에 걸터앉은 흥분을 차마 뿌리칠 수 없음이지요.
뜻 없는 환호성 대신 옛 선비들의 감흥에 조용히 젖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 한밤중의 백록담. 월북시인 정지용이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무서워서 파랗게 질린다' 고 노래를 떠올리는 풍경이다.ⓒ오희삼
창파 높은 곳에 / 님이 여기 계시옵기
찾아와 그 품속에 /안겨보고 가옵나니
거룩한 님의 택(宅)이여 /평안하라, 한라산.

물결이 험하오메 / 꿈속에도 어려우리
고도(孤島)에 맺은 정을 / 다시 언제 풀까이나
내 겨레 사는 곳이니 / 평안하라, 제주도.

- 이은상의 '한라산등반기' 中에서

1937년 나라를 잃었던 암울한 시대에 국토순례길에 올라 국토의 끝자락 한라산에 올랐던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한라산을 일러 ‘하늘산’이라 하였고, 산정호수 백록담을 ‘볼늪’이라 외쳤습니다.
‘하늘산’이란 원래의 이름에 억지로 한라산이란 한자(漢字)의 옷을 입힌 것이라 여겼지요.
곧 조선조의 지리지 여지승람의 ‘한라자(漢拏者) 이운한(以雲漢) 가나인야(可拏引也)(‘한라’라는 이름은 은하수(雲漢)를 만질수 있다는 뜻)‘의 해석에 따라 옛사람들이 한라산이라 하였다지만, 노산은 한라산에 ‘하늘산’이란 우리말의 원의(原義)가 숨어있음을 갈파하였습니다.
백록담도 그러합니다.
‘신선이 흰 사슴을 타고 놀던 연못’이라는 설화에서 비롯되었다지만, 볼늪, 곧 광명지(光明池·깊고 높고 영광스러운 연못)라는 참뜻을 묻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었던 시대에 본래의 우리말의 참뜻이 더러는 와전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지금은 굳어져 버린 한라산과 백록담의 참뜻의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일도 오늘의 한라산을 오르고 머무는 자들에게 주어진 보람은 아닐는지요.

▲ 세상에서 가장 키작은 나무인 돌매화.ⓒ오희삼
한라산 뻗어 내린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라산은 그 자체만으로 영산(靈山)이요 어머니요 하늘이었습니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창조한 신(神)들의 거처였으며 수많은 전설들이 흘러나온 샘이었습니다.
국토의 변방으로써 고립되고 단절된 질곡의 역사 속에 수많은 애환과 사연들을 묵묵히 지켜본 이 또한 한라산이지요.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민요들 중엔 한라산이란 구절이 들어간 내용들이 많습니다.

‘한락산 허리엔 나무들도 많고요
이내 가슴엔 잔 수심도 많구나’
‘한라산에 쌓인 눈은 봄이 되어 녹건마는
이내 가슴에 쌓인 시름 언제나 녹을까‘

▲ 오랜 세월 풍화에 씻긴 한라산정의 바위에는 저마다의 표정들이 담겨져 있다.ⓒ오희삼
비옥하지 못하여 생산이 풍요롭지 못했고, 사나운 바닷바람에도 맞서야 했던, 그리하여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섬사람의 애환을 한라산에 기대여 달랬던 마음의 노래였을 테지요.
한라산이 그토록 높은 것이 어쩌면 고난의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섬사람의 한숨과 눈물이 쌓아놓은 무덤은 아닐는지요.
저들의 소박한 바램과 속절없는 희망을 하늘에 기원하는 제단이 아닐는지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로운 섬 제주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단절(斷絶)의 상징입니다.
숙명의 땅에 유배된 설움은 설화를 낳았지요.
창조의 여신 설문대 할망이 명주 100동을 마련해주면 섬사람의 소원인 육지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그러나 섬에 있는 명주를 모두 모아도 99동 밖에는 될 수 없었고, 결국 고립이라는 천형(天刑)을 벗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고이고 고여도 흘러넘칠 수 없는 백록담처럼 말입니다.
하여 섬사람들은 ‘이어도’라는 이상향을 꿈꾸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하여 흐를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벗고 산지사방 휘젓는 바람의 힘을 빌어 이어도에 이르는 소박한 꿈을 이 곳 백록담에서 간절히 기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오희삼 님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10년째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한라산지킴이입니다. 한라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좋은 글과 사진으로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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