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책읽기(8)] '한국의 아파트 연구'를 읽고

▲ 한국의 아파트는 도시의 현대화를 이끌었다는 저자의 주장이 담긴 책.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한국의 아파트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로 하나의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도시에 살게 되면서 집장만이라면 아파트를 사고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고 탓인지 도시의 아파트나 아파트 단지 라는 것이 우리 삶에 들어온 '이상한 무엇'이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소설에서 집으로서의 아파트가 주는 느낌을 읽은 적이 있지만 작가의 시각에 공감하고 말뿐이었는데, 아파트가 주제가 되어 책으로 나왔다니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책을 쓴 프랑스 지리학자인 발레리 줄레조 교수는 프랑스의 아파트 단지인 '씨떼'가 프랑스인들에게 외면을 받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에 궁금증을 가졌다.

한국에서의 5년 간의 연구 결과 만들어진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각종 보고서를 검토하였고, 주민들과 관리소 직원까지 방문하여 인터뷰하는 등 사회학적이고 지리학적인 연구 방법을 따라 만들어졌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잘 구성된 논문을 읽는 것처럼 자료그림과 통계표 등에 대한 설명도 꼼꼼하다. 외국인의 한국 연구가 이처럼 객관적 자료에 의해 면밀히 검토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소득이다. 우리 자신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 너희를 봐. 이런 모습이거든'하고 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거울과 같다.

연구의 시작은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서울, 거대한 촌락, 빛나는 도시'라고 붙인 프랑스판 책의 제목은 그녀의 아파트 연구가 특히 서울의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그녀는 한국의 아파트가 아주 독특한 성격을 갖고 한국 도시의 현대화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촌락이 빛나는 도시가 되기까지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현대화라는 말에 현기증이 날 때가 있다. 높은 빌딩에서 아래를 볼 때의 고공공포처럼 현대화된 건물과 상품의 빠른 유통과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넓고 빠른 도로의 확장을 볼 때면 곧잘 이전에 무엇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잊는다. 점점 타인들에 의해 자기 삶의 공간이 함부로 변해 버리는 세상으로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된다.

사회가 현대화 되면 될수록 자기 삶이 남의 손에서 양육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너무 거친 강박일까. 요즘 세상에 스스로 집을 지어 사는 사람이 거의 없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 집을 짓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삶의 모습은 아니다. 입는 것, 먹는 것의 대부분은 남의 손에 의해 생산된 것들이다. 가공의 정도에서 보면 가장 그 의존도가 낮아 보이는 먹는 일도 음식의 재료를 시장에서 사 온 후에야 음식 만들기의 작업을 하게 된다. 산업화 된 세상으로 갈수록 간편성이 늘어나고 자기 몸 대신 해 주는 의존의 마력은 커진다.

그렇지만 간편의 댓가는 반드시 있어서 먹을 음식. 입을 옷, 자야 할 공간을 제공 받기 위해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 재화의 교환에 필요한 돈을 벌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인 세상, 그만큼 산업화의 수준이 고도화 되었다는 것이며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세상 변하는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스멀거리는 두통같다.

▲ 이 땅의 흙과 돌과 나무로 지은 집이건만 점점 외면받고 있는 제주의 초가집.
이 책을 읽으며 줄곧 어릴 때 살았던 초가집이 생각났다. 제주도의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었다. 그런 집이라면 집 짓는 사람 옆에서 거들어가며 배우고 난 후 한 평의 오두막 하나쯤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유행하는 웰빙 주택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몸 누일 곳은 내가 만들어 본다는 생의 즐거움 때문에 언젠가는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을 짓겠노라 꿈으로 삼은 지 오래다.

▲ 빛나는 도시 서울의 그늘, 판자집.
서울에도 이렇게 스스로 몸 누일 누락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 후의 피난민이 그랬고, 60-70년대에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도시외곽에 얼기설기 지은 집으로 서울살이의 처음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집은 그저 가족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그러나 판자집으로 불리는 이 집들은 도시가 커지고 서울이 세계의 도시와 비교되던 올림픽이 열릴 때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나라의 정책을 만들었다. 힘없고 밑천이 얇았던 사람들은 판자집의 기둥이 권력의 불도저에 의해 부서지듯 삶의 기반을 어이없이 내주어야 했다.

▲ 한국의 아파트는 단지를 형성하며 원래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을 단지 밖으로 밀어냈다.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 서울의 와우 아파트 붕괴 때문에라도 아파트에 사는 것을 그리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70년대 초만 해도 집의 개념은 단독주택과 동일했다. 그러나 좁은 땅덩어리인 서울에 사람이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지표면을 경제적으로 이용한다는 아파트 건설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정부는 인구정책과 더불어 주택정책에도 경제논리를 펴들었다. 어느 사이 아파트가 투자의 대상으로 안성맞춤이 되더니 수많은 경제개발예정지구들이 생겨났고 그곳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으며 자연히 투기의 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경제개발 예정지구 또는 재개발지구에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황금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높은 분양가 이외에도 계속되는 중도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동네를 새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그들의 동네 위에 우뚝 선 아파트 단지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아파트는 돈 있는 사람만이 구입할 수 있고 살 수도 있는 곳으로 바꾸어졌다.

한국의 서울, 몇 개의 대도시에서 아파트는 사람들의 경제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 갔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사는지, 몇 평 아파트에 사는지, 어느 회사가 만든 아파트에 사는지만 알아도 그 사람의 경제상황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아파트를 더 선호하고 집장만의 꿈은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데서 흐믓함이 커졌다. 18평 아파트 보다는 31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보다 더 경제적 우위에 있고 전세로 사는 사람보다는 자기 소유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안정된 사람으로 믿어졌다. 저축이 늘어갈 때마다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옮기고 새 아파트에는 신형의 가전제품으로 안을 채워 나가는 즐거움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공통분모격인 행복이었다.

▲ 다가오는 31일 발표될 정부의 부동산종합대책이 지역 시장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외쳤다. '대한민국에서 집 없는 사람 없게 해 줄게. 모두 내 집 장만 해 줄게'. 정부는 약속처럼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기업과 대한주택공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바람에 건설회사는 신나게 아파트와 도로를 만들었고, 그 건설회사의 형제회사들은 아파트의 내부를 맡아 꾸며주고 집집마다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는 선진국 시스템을 구축했다. 새 아파트에 맞는 새 가전제품과 새 가구와 새 자동차는 맞춤세트 같아 보였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럴수록 재벌들의 빌딩도 커져갔다.

아파트가 돈이 되니까 사 두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그 수요가 있으니 재벌들도 아파트 짓기에 여념이 없는 이 구조를 누가 말릴 것인가. 그러나 정부는 재벌과 주택공사의 도움으로 이 나라 국민들에게 집없는 설움을 없애 주었을까. 이 책의 저자가 한 마디 한다.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 새 것이라는 근대화 이미지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초기와 달리 요즘은 아파트도 브랜드화 되어간다. 자동차와 옷의 브랜드. 음식의 브랜드가 그렇듯이 주택의 브랜드도 욕망을 부채질 할 것이다. 재벌들은 광고를 만들고 정치권력에 손을 뻗어 우리의 욕망을 먹기 좋은 요리로 만들어 갈 것이다. 산업사회의 기업은 우리 주변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야 하는 게 그들의 생존적 운명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들의 먹이라는 표현은 지나치지만 진실이다.

우리 집은 15년 전에 지은 3층 짜리 연립주택이다. 어떤 이는 이 집 때문에 손해 봤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인 즉슨 처음 이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받았고 그것을 갚는 세월동안 다른 아파트의 값은 계속 올랐는데 이 연립주택은 거의 가격 변동이 없어 부동산 투자라는 측면에서 실패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연립주택을 탐탁치않아 하는 사람들은 유명 건설회사의 새 아파트를 선호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같은 평수의 비슷한 구조를 가진 새 아파트들은 이 집과 거의 2-3배의 가격 차이가 난다. 집이 만들어진 햇수와 새로운 실내인테리어의 사소한 차이가 두 배 세 배의 가격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유명회사의 신형 아파트가 그렇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한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은 2-3배 가난한 사람들일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2-3배의 높은 가격만큼 집을 위해 저축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대출금도 더 물어야 하니 그 이름값하는 아파트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고의 차이 때문에 나는 경제에 어두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인에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으로 여겼다. 부자들은 집을 살 집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십여 채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나의 사고방식은 영영 부자로 살기는 틀린 위인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짓고자 하는 흙과 나무와 돌의 집은 이 세상에 꺼내 보이기엔 너무나 관념적인 사치인가 싶어졌다. 산업사회의 가치인 돈 키우는 집과도 거리가 멀고, 행정기관의 증명서나 받을 수 있으려나, 어쩌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지 맘대로 지었다고 언제라도 행정기관의 불도저에 기둥이 풀썩 꺽일지도 모르겠다.

▲ 뉴욕시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 일컬어지는 이 저택은 안에 수영장과 골프장까지 갖추었다. 이런 집들은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던 것은 비교와 증거를 통해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의 아파트에 관한 객관적 사실을 더 잘 이해하고 한국에서의 아파트는 프랑스의 아파트와 달리 도시의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아파트가 슬럼화 되지 않은 것은 한국의 주택정책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객관적인 증거 자료를 보는 우리는 그녀가 슬쩍 언급했을 뿐이지만 뼈아픈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집을 지나치게 재산 가치로 여기며 투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그러다 보니 정부의 경제와 주택정책이라는 게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것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잘 살아 보자는 60-70년대의 혼란기를 거쳐 잘 살고 있다는 지금까지도 이 나라의 정책은 재벌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새겨들을 점이다.

반 세기 전만 해도 우리 주위에 없던 이 아파트라는 '이상한 물건'이 우리 삶으로 들어온 이후 얼마나 우리의 생각과 생활습관을 바꾸어 버렸으며, 건강과 인간관계까지 서서히 바꾸어 버리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집 안을 가꾸어 나가는 일과 집의 규모만을 키워 나가는 일은 분명 다른 출발선에 있다.

돈 되는 집이라는 반짝이는 욕망이 얼마나 우리 삶을 얽어매고 있는지를 돌아볼 일이다. 내가 터를 닦고 살고 있는 이 집 이전에 어떤 이의 삶이 그곳에 있었을지를 상상하고 집이란 도대체 자기 삶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질문은 '생각의 집'을 만드는 데 소중한 돌과 나무와 흙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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