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전학에 제주선 육지아이 육지선 제주아이

나의 성장과정에는 다른 사람과 다른 과정이 하나 있다. 출가 해녀의 아들인 것이다. 내 초등학교생활기록부에는 1학년 때 경상북도 감포국민학교, 3학년 때 경상북도 구룡포읍 석병국민학교로의 전학기록이 있다. 두 번 모두 어머니가 출가해녀로 경북지방에 가는데 나를 데리고 간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주소는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 구룡포읍 석병2리'

출가해녀의 아들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제주도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이 있어야 한다. 나의 아버지 고향은 이북 황해도이다. 황해도지만 아주 남쪽이어서, 6.25사변 전까지는 38도선 이남인 곳이다. 아버지는 6.25사변 전에 한국군에 입대했는데 6.25때 부상을 당하셨다. 휴전이 되고 나니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 되어 고향으로 가지 못해 제주도로 들어왔다. 그 후 제주도 본토박이에 해녀인 어머니와 결혼해서 내가 태어나게 됐다.

이북에서 월남한 아버지의 친척들은 인천에 많이 살고 있다. 인천에 있는 친척들에게 ‘왜 인천에 사느냐’고 물으면, 그때는 이렇게 오래 분단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곧 전쟁이 끝날 것이고 전쟁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고향에서 가까운 인천에 있다 보니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아버지는 왜 인천이나 서울 같은 도회지를 두고 하필 제주도까지 내려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만 제주도까지 내려오셔서 내가 태어나게 됐다.

아버지는 황해도 해주 서중 출신으로 공부는 조금 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공무원으로 제주세관에 근무할 때 어머니와 결혼했다. 내가 태어난 후,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셨다. 나도 술을 잘하는데 아버지를 닮아 그런 것 같다. 아버지도 어지간히 술을 잘 마신 모양이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더욱 더 술을 마시게 한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또 제주도에는 아버지 쪽 하나도 없고, 제주도에 있는 친척은 전부 어머니 쪽, 즉 외가 친척들뿐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해서 취직할 때 까지 우리 집은 계속 ‘돈’과의 싸움이었고, 돈 문제에 대해선 다른 친구들과 같은 보조를 맞춘 적이 없는 것 같다. 옛날엔 학교에서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러 가곤했다. 볼만한 영화를 학교와 극장이 계약을 맺어 아주 싼 요금으로 학생들을 입장시키는데 나는 그 단체관람마저 몇 편 밖에 볼 수 없었다.

출가해녀

출가해녀란 제주도가 아닌 육지로 돈 벌러 나가는 것을 말한다. 무작정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고지, 연고자가 있어야 나갈 수 있다. 연고자란 인솔자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인솔자라는 이 단어이다. 인솔자란 육지 어느 지방의 유지가 바다의 권리를 사놓고 물건을 건져올리지 못하면 이 물건을 건져올릴 해녀를 제주도에 와서 데리고 가는 사람을 말한다. 주로 그 지방에서 힘깨나 쓰는 유지들이다. 유지쯤 되어야 바다의 권리를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가는 시기는 봄부터 늦가을 추워질 때 까지다.

1년의 2/3를 돈 벌러 나가니, 나가는 사람들도 꽤 큰 꿈을 그리며 나가게 된다. 좋은 인솔자를 만나고, 물량도 많고, 벌이가 좋으면 한 번의 출가로 상당한 돈을 가지고 귀성하게 된다. 인솔자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해녀는 제주도 말로 하면 상군잠수들이다. 그 상군 잠수들은 나이도 있어야 하지만 경험도 필요하다. 그래서 주로 20대 후반 아니면 3~40대다. 30대로 올라가면 기혼자들인데, 기혼자들은 남편이 마누라를 출가해녀로 보내고 나면 반 년 이상을 홀아비로 있어야 한다. 인솔자로 보면 남편을 설득하는 데 힘이 드는 등 큰 방해가 된다. 그러나 너도 나도 돈이 궁한 현실이라 남편들도 손을 들고 만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기혼자들이 있었다.

전도금이라고 있는데 육지로 데리고 나가기 전에 인솔자가 미리 돈을 푸는 것을 말한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돈이 필요할 것이며, 기혼자들의 남편의 찬성을 얻어내는 데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라가서 벌 돈의 일부를 미리 주는 것이다. 이 돈으로 여비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목적으로 한 돈을 전도금이라고 한다.

인솔자라고 해도 제주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서 해녀들을 인솔하겠다고 하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제주도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거나 인연을 만들어서 오는 사람들이다. 또한 어느 인솔자 밑으로 가서 반 년 이상 일해 큰돈을 모으고 오게 되면 그 인솔자는 소문난 인솔자가 되고, 다음해에 그 인솔자가 오면 해녀들이 모인다. 실제 내가 봤던  경우는 인솔자의 부인이 제주도 사람이었고 친정이 우리 동네여서 어머니가 신뢰를 한 모양이었다.

가족들을 동반해서 가는 경우는 없었다. 자식들과 같이 가는 경우는 아무래도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 당연해서 인솔자가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제주도에 나를 맡길 곳이 없었고 어머니가 상군잠수이므로 나를 동반해도 좋다고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1960년대의 제주도의 사정과 아버지가 없는 집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출가해녀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물론 잘 다니던 제주북교에서도 전학을 가게 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평택호인지 이리호인지는 몰라도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지금의 고속버스가 아닌 시외버스로 감포까지 간 기억이 생생하다. 장기 시외버스이기에 일단은 울산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장시간 여행이고 울산에 가서 밥도 먹고 또 군것질거리도 사서 다시 차에 타 거의 하루쯤 걸려 부산에서 감포까지 갔다. 인솔자가 소개해 준 어느 집의 빈방을 사글세로 얻어서 살림을 시작하고 어머니는 매일 물질을 하러 갔고, 난 감포국민학교 1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그때 감포국민학교 1학년은 책상이 없는 교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교실 마루바닥에 텁석 주저 앉아서 공부를 한 기억이 난다. 무언가 잘못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아직도 내 머리 왼편에 수술자국이 있다. 가을, 꿈에도 그리던 고향 제주에 와서 모교인 제주북교로 다시 전학을 왔는데 제주도에선 경상도 아이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때 감포 출가해녀였을 때는 어머니의 벌이가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탑동에 집을 사서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출가해녀 1년으로 그 빚이 정리가 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장봉구 씨’ 인솔자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 꽤 인자하신 분이었고 나에게도 잘해주셨다. 석병2리 이장이기도 했다. 그 인솔자가 데리고 간 해녀가 약 10여 명 쯤 됐나, 모두들 몇십 호 되는 동네에서 방을 얻어 살았다. 십 수 명이나 되는 제주도 해녀들이 그 동네에 들어간 것은 그 동네에서도 큰 이벤트였다. 내가 가기 몇해 전부터 제주도 해녀들이 출가를 왔다갔다 한 것 같다. 또 제주어협에서도 출가해녀를 관리하는 것인지 살펴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직원들이 파견 나와 있었다. 또 어느 날 구룡포읍 관내 출가해녀들을 모아 극장을 빌어 노래자랑인지를 했는데 거기에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1960년대 경상북도 어느 깡촌의 풍경보다는 내가 살던 고향 제주도가 훨씬 좋았다. 차는 하루에 몇 번 다니는 시외버스가 고작. 비포장도로에 차가 다니고 나면 일어나는 그 먼지. 어린애들은 그 먼지가 일어나는 버스 뒤를 쫓아가곤 했다. 아마도차 배기구에서 나오는 휘발유 냄새가 우리를 뛰게 했을 것이다. 언제 저 차를 타고 내가 살던 고향 제주도로 가나 하면서 힘껏 쫓아가곤 했지만 그 날은 곧 오지 않았다.

그 때는 아침마다 밥을 빌러 오는 애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깡통을 들고서 밥을 빌러 다닌다. 또 그 중에는 우리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아니 저애도?’라고 놀랄 정도로 상당수의 어린아이들이 아침마다 밥을 빌러 다니곤 했다. 그래서 아무도 못 보게 방문을 닫아 놓고 아침을 먹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같은 출가해녀 한사람 더. 이렇게 두 집이 방 하나를 얻어 살았다. 출가해녀들은 누구도 혼자서 방을 얻어 살지 않았다. 방값을 절약하는 방법으로 주로 두 집 이상의 해녀들이 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생활했다. 그때 내가 살았던 주인집도 곤란하기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집 애들이 많았다. 나하고 같은 동급생 여자애도 있었고, 또그 오빠도 있었다. 그 오빠는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결국 중학교를 포기한다고 했다. 둘 말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았지만 곧 죽고 마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내 동급생의 남동생, 아마 1학년쯤 된 녀석이 옷을 안 입고 고추를 내어놓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갈아입을 옷이 없어 그러고 있었단다. 요즘 우리의 삶은 어떻게 얻어진 삶인가?

이런 깡촌에 젊은 여자들이 십 수 명 일시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처녀들은 아주 좋은 색시감이다. 해녀 물질이란 그곳에서 아주 고급 노동력이요 고급 직업이며, 또 하이테크 직업이었다. 제주 해녀 출신을 색시로 삼으면 좋은 어장과 좋은 직업이 아주 잘 맞아 떨어지게 된다. 이상하게도 바다가 있고 좋은 물건도 많았지만 그 동네 출신 해녀는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 동네 총각들은 눈에 불을 켜고 색시감을 찾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도 여자와 육지 남자와 결혼은 집에서 그리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든 어느 해녀가 처녀들의 보호자가 되어 파리가 붙지 않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육지로 물질을 보내면서 처녀의 부모는 나이든 부모에게 신신당부를 해서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사람 중 유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다. 그의 외가집이 제주도이고 그의 고향이 아마 강원도 삼척일 것이다. 그때 제주도 해녀들이 강원도까지 출가 해녀로 진출을 했었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석병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제주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우리 3학년은 2학급이었고 나머지 학년은 아마 1학급이었다. 이 ‘제주아’를 보려고 멀리서도 뛰어와 나를 보고 가곤 했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셈이다. 이 때 나는 이발충이라는 피부명이 붙어 무지하게 고생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애들 다수가 이발충이 붙었는데 점심때쯤 학교가 파할 때 1학년 담임이신 여자 선생님이 머리에 약을 발라주셨다. 그 약을 바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발랐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또 시험 볼 때는 학교에 종이가 없어서 종이를 사오라고 한다. 1원에 몇 장 주는 누런 시험지 종이를 사서 학교에 내곤 했다. 한번은 학교가 파하고 약 30분 거리를 걸어서 오는데 누군가 문둥이 나왔다는 말에 모두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며 도망을 갔다. 문둥이는 어린애의 간을 빼어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집으로 도망 오는 길에 고무신을 찢어먹고, 찢어먹은 고무신을 손에 들고서 맨발로 뛰었다. 그 찢어진 고무신은 바늘로 꿰메어 한참 신고 다녔다. 지금도 가라오케에 가서 ‘맨발의 청춘’을 부르는데 그때의 맨발의 청춘을 연상한 것이다.

그곳 경상도의 깡촌은 바다근처지만 고기 잡는 어촌과 농촌이 복합된 마을이었다. 나는 제주도에서 밭농사는 봐왔지만 논농사는 처음 봤다. 논에 가서는 좀 놀았다. 특히 개구리들이 많아서 논에 뱀들이 많았다. 동네에 상급생이 있어서 이 상급생이 ‘제주아’를 데리고 다녔다. 이 상급생은 뱀 잡는데 명인이었다. 논에 가서 뱀을 보면 몽둥이로 후려친다. 그러면 뱀이 고개를 쳐들고서 덤빈다. 한 번 더 후려치면 뱀이 기진맥진 한다. 그런데 뱀은 생명력이 강해서 죽었으려니 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살아서 사람에게 고개를 쳐들고 다시 덤빈다. 완전한 확인사살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잡은 뱀을 몽둥이에 걸고서 개선장군처럼 동네에 들어온다. 그래도 무서워서 손으로는 못 잡고 몽둥이에 걸고서 들어온 것이다. 한번은 이 꼴을 어머니에게 들켜서 그 몽둥이로 매를 실컷 맞았다.

이상하게도 이 ‘제주아’가 그 지방의 본토박이들을 제치고 공부 1등을 했다. 그때 1학기말 종업식 때 무슨 상을 탔었다. 그 상이 아직도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해녀들의 작업은 천초라고 불리는 우뭇가사리와 미역이 제일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전복, 소라, 멍게 등도 마찬가지다. 천초나 미역 같은 물건은 인솔자가 관리를 엄격히 해서 싹 걷어가지만 전복이나 소라 등은 인솔자의 관리에서 벗어난 물건인 것 같았다. 그래서 상인들이 와서 자유롭게 사간다.

또 재미있는 것은 떡을 파는 사람들이 떡을 만들어서 해녀들이 작업하는 곳에 와서 무엇과 바꾼다. 아마도 천초 등 값이 단단히 나가는 물건을 슬쩍 떡과 바꾸어 준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가 파한 후에 어머니들이 작업하는 곳에 가서 재수가 좋으면 떡이 생긴다. 천초 등 대단한 물건은 인솔자가 걷어가고, 전복이나 소라 등은 그 아래 상인들이 현금으로 사가고 그렇지 못한 야미 물건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떡 장사인 셈이다.

그 떡 장사들이 바꾼 물건을 들키지 않게 감추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곤 했다. 나는 그 떡 장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내가 가서 떡 사달라고 칭얼대면 어머니나 다른 해녀들이 슬쩍 물건을 집어 준다. 내가 칭얼대면 그들의 장사 물건이 나오게 되는 셈이다. 보리쌀을 사서 밥을 먹으면 되지만 반찬은 쉽게 살 수 없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가게가 발달된 때도 아니고 주로 자급자족하는 마을의 생활에서 우리 같은 뜨내기들은 반찬이 아주 어려웠다. 바다에 돈이 안되는 물건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제주도말로 ‘보말’은 무진장 있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잡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그걸 잡고 와서 된장과 바꿨다. 된장이라도 있을 때는 좋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간장 즉 왜간장이 유일한 반찬이 될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구룡포 물질의 벌이는 별로 시원치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곳에서 또 다른 바다로 원정을 가곤 했다. 한 번 원정 나가면 며칠씩 있다가 돌아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움막같은 어두운 방에 지내야 하는 타향살이를 그 어린나이에 경험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추워질 때 쯤 ‘꿈에 그리던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아마 10월 말 쯤 일 것이다. 아침에 부산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가 반겨주신다. ‘할머니’라고 불러야 될 것을 ‘할매요’라고 불러서 할머니가 ‘아이고 이 놈, 경상도놈 다 돼서 돌아왔구나’하고 붙잡아 우시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도의 큰 자랑거리이자 산업이었던 해녀질, 그 해녀질의 일부분을 담당해온 출가해녀. 이제 그 형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출가해녀라는 단어는 사어(死語)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희망이다. / 신재경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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