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진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제심포지엄3] 조선인 희생자 명단과 주소

'관동대진재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에서는 관동대진재 88주기를 맞이하는 올해 제주도에서 8월 27부터~9월 10일까지의 일정으로 간토(関東)조선인학살 기획사진자료전시회를 열고, 8월 28일(일) 오후 4시에는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간토(関東)대진재'에 대하여 4회에 걸쳐 소개해 그 이해를 돕고자 한다. / 편집자주

▲ 제6차 관동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기획전시, 국제심포지엄 포스터. ⓒ김민수

광복66주년을 맞이한 2011년의 8월을 보내면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생각들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지난 3월,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 등으로 일본열도가 실의에 빠졌을 때 한국인들의 자발적 성금이 이어졌다. 과거의 아픈 역사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이웃 나라의 고통을 도왔다는 데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도 느꼈다. 역사적인 아픔 혹은 상처가 치유되는 방법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진상규명과 사과와 배상이 없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러나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동해의 일본해표기 등의 문제, 역사왜곡교과서 문제, 과거사에 대해 반성 없는 일본 보수우익의 입장 등을 보면 언제든지 다시 야수로 돌변해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 같아 소름이 돋기도 한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라는 말에는 이런 복잡한 심정들이 포괄되어 있다고 본다. 스포츠를 위시한 모든 한일전에서 '꼭 이겨야만 하는 나라'로 서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지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과거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한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일본은 거듭 주장하고 있다.
 
한일협정문 제2조에 "(협정)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양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그들은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 문건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990년대까지는 협정문에 관계없이 개인 청구권이 존재한다는 자세를 취해지만, 이후에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최근 일본 법원도 한일협정에 의해 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논리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지속적으로 기각하고 있다.
 
결국, 진상규명과 사과와 배상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인 경구가 현실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1923년 한일간토시민연대(이하 1923년 시민연대)'가 꾸준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관동대지진을 알리고, 진상규명을 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족을 찾지 못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하지 못했다

구학영의 묘 묘비에 적혀있는 이름과 주소는 풍상에 의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국과 국민의 무관심에 사라지고 있다. ⓒ김민수
 
2009년에 열린 '제5차 간토조선인학살현장연구'모임에서는 엿장수 구학영씨의 유족을 찾는 일이 진행되었다. 엿장수 구학영(당시 28세)는 자경단을 피해 요리이 경찰분서(奇居 警察分署)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이웃마을 자경단들이 들이닥쳐 그를 끄집어내서 일본도와 쇠갈쿠리로 처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살던 고향 주소(조선 경남 울산군 상면 산전리)가 적혀있었다. 그 주소로 유족을 찾는 활동을 했지만, 결국 지금까지도 엿장수 구학영씨의 유족을 찾질 못했다.
 
2009년 '1923년 시민연대'는 간토(関東)대지진 직후 조선인 대학살 희생자로 추정되는 5명의 인적사항을 공개하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송을 하려면 유족을 찾아야 했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소송에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1923시민연대'는 전남 목포시 거주 김대원(85)씨의 큰아버지 김광진씨와 그 친척, 동네 주민 등 5명이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대학살의 피해자로 추정된다며 김대원씨의 간접증언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했지만, 이들 5명의 주소가 전남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로 되어있는 점, 1922년 9월 1일 일본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1930년 사망신고 과정에서 실제 사망일보다 1년 앞당겨 착오로 오기된 것이라고 시민연대는 보고 있다) 만으로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으로 이어갈 수는 없었다.
 
1923년 9월, 간토(関東)에서 6천 명이 넘는 조선인 대학살이 일본 정부의 교묘한 계략에 의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도 없고 사과도 없는 현실과 이를 묵인하는 한국정부의 역사인식은 언제든지 다시 이런 일들이 재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간토(関東)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리스트

속죄하는 일본인 제노사이드를 연구하는 마에다 아키라 교수와 일본에서 온 초등학생이 사죄하는 마음으로 전남 신안 팔금면에 있느 희생자의 헛묘를 찾아가 추도하고 있다. ⓒ김민수
 
2009년 5월 8일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가 조사하여 발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리스트'에 따르면, 사망자들은 일본도, 쇠갈고리, 도끼, 철봉, 목검, 단총, 죽창, 단도 등과 무차별적인 구타로 사망했다. 그 사망자 리스트 가운데, 주소가 확인된 이들의 명단과 주소만 밝힌다.
 
이번 '제6차 관동대진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제심포지엄' 행사를 마친 뒤 이들의 유족들을 찾을 수 있길 간절히 고대한다. 특별히 제주도에서 열리게 된 배경에는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속해있음)'의 조묘성(趙妙城), 조정수(趙正洙), 조정하(趙正夏)씨가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조묘성은 학살될 당시 임신한 상태였으며 조정수, 조정하와 함께 카메이도 경찰서에 결리 수용되어 있다가 군대에 의해 끌려가 척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까지 조사된 사망자리스트에 올라온 희생자 명단 중 당시 동네 명까지 기록된 이들은 22명으로 아래와 같다.
 
박경득(朴庚得 24) 경기도 개성군 장서면 구하리
김재근(金在根 44) 전남 순창군 풍산면 연승리
조묘성(趙妙城)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
조정수(趙正洙)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
조정하(趙正夏)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
김해명(金海明 44) 경북 각남면  구곡동
김철진(金喆鎭 41)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안동
조정원(趙庭遠 43)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안동
김백출(金白出 29)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안동
남수규(南收圭 38)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안동
금인수(金仁洙 22) 경북 상주군 양남면 석촌리
허일성(許日成 25) 경북 상주군 양남면 석촌리
김성래(金声来 34)경북 영주군 영산 면포동    
김두성(金斗星 23)경북 영주군 관현동  
이상호(李相浩 26)경북 영주군 영산 면포동  
김동원(金東元 27) 경북 예천군 감천면 동산동    
정귀봉(鄭貴鳳 25)경북 청도군 구도면 합천리
박이현(朴以鉉 41)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송북동
조수구(趙秀九 27)경남 진주군 진주면 중안동
구학영(具學永 28) 경남 울산군 상면 산전리
천곡야(泉曲野 24)경남 울산군 능촌면
김수일(金秀一) 경남 사천군 읍내면 선동
 
제6차 간토(関東)대진재 국제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어려움

헛묘 추모 김대원 옹과 함께 전남 신아면 팔금면에 있는 헛묘를 찾아가 일본 연구자와 시민, 독일인 연구자도 함께 추모하였다. ⓒ김민수
 
이번 대회를 준비를 총책임지고 있는 실행위원장 김종수 목사(49)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는,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인 중에서도 이 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많은데, 정작 한국인은 이 문제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이다. 정부기구로서 과거사를 정리하는 기구가 있어왔음에도 유독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치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처럼 생각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속히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조사에 착수하기를 바라지만 관심을 가져야 할 역사학 출신의 의원들조차도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법제정이 안 되어 조사를 하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곳곳에 은폐되어 있을 이 사건의 기록들을 소멸시키지 않도록 자료보전 및 공개요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사망자 명단을 만들고 있는 일본의 활동가들은 관련자료들을 공개하면 더 많은 사망자의 신원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재정적인 문제다. 행사를 꾸려가고 진행하기 위해 실행위원과 공동대표와 몇몇 후원단체들의 후원만으로는 진행비용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런 행사를 진행하고, 자료를 조사하는 일들을 몇 년째 진행하면서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로 압박을 받아왔다.
 
이번 27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6차 관동대진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은 제주 4.3항쟁과도 관련하여 국가공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 이면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역사를 바로 잡아가고자 하는 소중한 움직임이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문의사항 :  1923 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의 한국상임대표, 본 행사 실행위원장, 김종수 목사 010-5382-2406) /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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