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과 제주

30일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제주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냉전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4.3의 아픔을 당한 제주에 한 없는 안타까움을 보내고 많은 애정을 보낸 그였다. 하지만 제주는 그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김근태와 제주는 1980년대 중반으로 올라간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피의 진압으로 막은 내린지 3년여 후 김근태 고문은 민청련을 만든다. 민청련은 제주에 별도조직을 두진 못했지만 86년 오만식 전 도의원이 민청련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그와 제주가 민주화운동에서 본격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한 건 1989년 1월 한국 민주 변혁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가져온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창립되면서다. 연대운동의 구심체였던 전민련 지역조직으로 제민협(제주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 결성됐고, 민주화진영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군사독재정권 타도운동에 돌입했다.

전민련이 세를 넓히면서 군사정권과 사이에 긴장감이 한창 고조될 1990년 7월 김 고문은 전민련 정책위원장 자격으로 제주를 찾는다. 제민협에서 주최한 ‘민생파탄 주범 민정당 규탄대회’에 강사로 내려왔고, 그날 저녁 고인의 수배령이 내려진다.

강연을 마치고 제주 처제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려 했던 그는 새벽 처제 집에 들이닥친 공안요원들에 의해 체포되고 또다시 구속된다.    

당시 제민협 사무처장으로 김근태 정책위원장 행사를 주관했던 오옥만 통합진보당 제주도당 위원장은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인 김근태 고문이 제주에서 구속됐다는 게 우리들에겐 큰 아픔이었다”면서 “새벽 아파트에서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비행기로 이송되는 모습을 멀리서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제주운동권은 김근태 고문에게 항상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정치인 김근태 고문이 제주에 아픈 기억을 가진 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민주화운동으로 나름대로 세력과 명분, 조직을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막상 제주 대의원 경선 뚜껑을 열자 7위로 꼴찌를 했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그의 성격이 정치판에선 오히려 장애가 됐다. 제주에 이어 울산에서도 7위에 그친 김 고문은 경선과정에서의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고 "아름다운 꼴찌를 기억해달라"며 경선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정치적 좌절을 겪기도 했다.

김근태 고문은 제주에서 아픔을 맛 보았으면서도 항상 제주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고인은 평소 “저는 과거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는 등 수난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주도 역시 크나큰 아픔과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픔과 수난을 함께 하는 제주도는 저의‘제2의 고향’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왔다. (2002년 1월 10일자 제민일보 인터뷰 중에서)

오영훈 전 도의원은 “김근태 고문님과 제주의 인연이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제주, 제주사람들과 계속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고 제주에 많은 애정을 보내 주셨다”고 전했다.

고인의 처제는 제주에 살고 있다. 김 고문의 손아랫동서는 문인경 한라대 교수다.  <제주의소리>

<이재홍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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