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칼럼> 6시 내고향에서 보는 제주는 어떻게 보일까?

  우선 반성 하나.

그동안 글이 뜸했다.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11월 초 고질이었던 허리 수술을 받았다. 살을 째고 뼈와 뼈 사이를 긁어냈다. 퇴원 후 관리만 잘 하면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고 의사는 설명했지만 수술 후 신체 리듬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과장된 변명은 이제 그만 본론으로,

‘제주’ 혹은 ‘제주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고향을 떠나 뭍에 살기 시작하면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제주적’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리라. ‘제주’가 무엇인지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 혹은 지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흔히 지방/지역이 중앙/중심 나란히 놓이면 둘 사이에는 일종의 위계가 발생한다고 말한다.(지방이냐 지역이냐 하는 용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서울 또는 서울중심주의라는 말을 혼용한다) 서울의 하위개념으로서의 지방/지역이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지방에 대한 무의식적 비하가 바로 이러한 계열화가 내면화된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지방/지역이라는 용어보다 가치중립적인 ‘로컬’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지방/지역이든 로컬이든,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지방/지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지역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중앙/중심은 무엇이고 지방/지역은 무엇인가를 ‘동시에’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질문이 ‘동시’에 던져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얼마간의 단호함을 요구한다. 중앙/서울과 지방/지역을 동시에 묻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질문은 서울이 확인하려는 지방/지역의 정체성에 대한 재확인만을 하게 될 뿐이다. TV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KBS 1TV에서 매일 6시에 방영되는 ‘6시 내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지역 방송총국을 연결하며 지역의 모습을 매일같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준다. 프로그램 속의 지역은 먹거리 생산기지로서의 지역(철마다 바꿔가며 산지의 먹거리를 소개하는 꼭지들을 보라. 군침을 흘리며 방송하는 리포터와 진행자들에게 지역은 맛있는 먹거리가 풍부한 풍요의 상징일 뿐이다.)이며 훈훈한 인정과 인심이 넘쳐나는 곳이다. 매일같이 미디어는 지역을 ‘발견’하며 지역을 ‘소비’한다. 이때 ‘발견’되고 ‘소비’되는 지역은 실재가 아니라 가상이다. 현실의 허구적 재구성이 예술이라면 허구의 현실적 구성, 이것이 바로 미디어에 ‘발견’되고 ‘소비’되는 ‘지역’의 모습이다. 미디어는 도시인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미디어는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다. 도시인들의 욕망의 과잉으로 가득한 미디어. 그 자리에 지역이 있을 자리는 없다. 호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지역의 현재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역의 가치는 중앙-지역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거나, 중앙-지역의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데에 있지 않다. 중앙-지역의 위계질서를 확인함으로써 지역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것은 지난 해 그 난리 법석을 벌였던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중앙의 권위(세계 7대라는 타이틀이 주는 권위의 힘)를 빌려 지역을 확인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불유쾌하며 참담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나의 가치를 내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확인, 인정받으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로부터 자아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는 태도는 자기 가치를 부정한다는 전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지역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스스로 부정하는 이러한 관 주도의 이벤트는 한마디로 제주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 철학의 부재가 만들어낸 블랙 코미디다.

또한 서울-지역의 위계를 전복하려는 행위는 일면 그 자체로 매력적인 작업으로 보일 수 있다. 이른바 중앙과 대별되는 또는 중앙에 필적하는 그래서 때로는 중앙을 뛰어넘는 “제주적인 것”을 상정하는 것은 지역의 자존심,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빠질 수 있는 오류는 서울이 지역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차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도는 제주적 가치가 관변의 언어로 이용되기도 한다.

종종 무슨 정신이며 제주인의 저력이라는 것이 지역의 가치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슬로건쯤으로 사용되는 것은 지역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중앙의 그것과 닮아지려고 하는, 그래서 지역의 가치를 자기 권력의 수단쯤으로 인식하는 일부 토호들의 상투적 수법이다.(선거철만 되면 ‘제주의 자존심’ 운운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적을 증오하면서 적을 닮아가는 태도이다. 서울중심주의를 공격하면서 자신이 서울의 권위를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그러한 점에서 제주적인 것, 지역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화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상상력을 중앙이 되고 싶은 지역의 욕망에 묶어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동현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역의 가치에 대한 조명이 서울중심주의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버린 문화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하는 일련의 시도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근대-서울-제주’라고 하는 거대한 판을 가로지르는 종횡무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근대로 위계화된 견고한 사슬의 해체가 필요하다. 지역, 그 중에서도 제주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중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강요된 질서의 틀을 부술 수 있는 자원, 그 문화적 상상력의 위대한 자본이 바로 지역에 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의 가치에 대한 발견은 지역을 서울에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인정 욕망에도, 지역을 서울로 만들어버리려는 자본주의적 욕망에도 빠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공무원들을 동원해서 그야말로 ‘전화질’로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오르려는 허접한 욕망이 아니고 해저터널이니 무슨무슨 랜드마크니 하는 토건 자본주의적 발상으로 섬을 서울의 어디 쯤으로 만들려는 탐욕도 경계해야 한다.

새해가 밝으니 선거철이다. 제주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제주의 일꾼이 되겠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진정 제주적인, 지역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을 찾는, 눈 밝은 시민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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