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제주영화제 개막작 마사키 하라무라 감독의 '해녀 양씨'

▲ 마사키 하라무라 감독의 다큐멘터리 '해녀 양씨'.
25살, 젊디젊은 나이로 일본땅으로 건너가 오로지 자식들만을 생각하며 깊은 바다에서 소라와 전복을 땄던 어머니.

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식들을 맘껏 볼 수도 없습니다. 현재 양의헌 할머니(89)는 일본에 살고 있지만 생때같은 세 아들은 북한에, 항상 안스러운 둘째딸은 남한에 있습니다. 일본에는 장남과 막내아들, 큰딸이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 할머니의 자식들이 3국에 흩어져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념과 전쟁 때문입니다.

▲ 가혹한 삶에 원망도, 절망도 많이 했다.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잠수일을 해온 양의헌 할머니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해녀 양씨'.

30일 '제4회 제주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된 마사키 하라무라 감독의 '해녀 양씨'는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 제주해녀의 3년 동안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38년전 한일 관계 역사 연구가에 의해 제작된 재일잠녀의 생활을 담고 있는 영화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기존의 자료화면과 현재의 기록이 혼합된 '해녀 양씨'를 통해 재일동포 1세대의 삶을 그리며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가족이 붕괴된 듯 하지만 여전히 가족적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어머니의 애닯은 삶을 담아냈다.

살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너무 어린 나이인 둘째딸을 밀항선에 태우지 못해 고향 제주에 두고 가야 했던 양씨. 그것이 못내 가슴 한켠에 아픔이 됐지만 53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의 바닷가에서 "시국을 탓해야지 누구를 탓하겠냐"며 고개를 떨구는 어머니.

1916년 제주에서 태어난 양의헌 할머니는 해방, 제주4.3, 한국전쟁, 분단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25살 되던 해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 그곳에서 70살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며 소라와 전복을 땄다.

▲ 25살에 일본에 가서 70살까지 잠수를 했던 양씨.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그녀였지만 지금도 바다의 어느 쯤에 가면 소라가 많고 어디는 전복이 많다는 것이 눈에 훤하다고.

3월부터 10월까지 매일같이 바다로 나가며 '부모님은 왜 나같은 걸 나아서 이렇게 고생하며 살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에 일을 하며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바닷물에 씻겨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고된 물질을 하루도 거르지 못했던 뒤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 조총련의 북송 프로젝트로 북한에 보낸 세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7남매를 둔 그녀는 벌이가 없는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무더운 여름날 다른 해녀들은 작업이 끝난 후 시원한 우유를 사 마셨지만 그녀는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지근한 수돗물로 갈증과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자식들을 위하며 생활하던 양씨가 생때 같은 자식들을 곁에 두지 못하는 데에는 남한과 북한의 이념 갈등과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역사가 있다.

제주 4.3 당시 일본에서 다시 고향 제주로 와서 지내고 있던 양씨는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고 살기 위해 다시 일본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밀항뿐. 밀항선에는 어린 아이를 태울 수 없다는 이유로 어린 둘째딸은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가족과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조총련계 일을 하던 남편 때문에 다시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내야 했다.

그녀의 길고긴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북송 프로그램에 의해 북한으로 보내진 세 아들 때문에 그녀는 '조선'이라는 국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남한에 있는 둘째딸마저도 쉽게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 북한에 있는 아들들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조선' 국적. 이 때문에 남한에 있는 딸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
길고 긴 기다림의 끝에 2002년 봄,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53년만에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게 됐다.

▲ 53년만에 고향을 찾아 부모님 무덤도 찾았고 자신을 기억해 주는 소꿉동무도 만났다.
25살 꽃다운 나이에 떠난 고향을 백발이 된 후에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 고향에는 형제들도 없고 조카들과 그를 기억해 주는 옛 동무 한명만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53년만의 귀향으로 37년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둘째딸. 어수선한 시대상황으로 인해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했던 그녀의 설움은 어머니와 함께 찾은 옛 고아원터 바닷가에서 터져나온다.

▲ 고아 아닌 고아라 살게 했던 둘째딸의 눈물 앞에 어머니는 시국탓을 해본다.
설움과 그리움으로 눈물 흘리는 딸에게 "시국을 원망하라"는 말만을 되풀이한다.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오로지 돈만 쫓으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 자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생계를 위해 살갑게 챙겨주지도 못하고 일만 했던 어머니로 기억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던 그녀인데 분단된 조국 앞에 그녀는 자식들을 맘껏 만나지도 못한다.

'조선'이라는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가끔 북한에 있는 아들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 아들들을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간다. 북한 방문 때마다 양씨의 짐은 한 트럭이다.
북한에 있는 아들들을 방문할 때는 절대 빈손으로 가는 일이 없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모두 털어 선물을 장만하고 또 생활비를 보태주고 온다. 그녀의 이런 악착같음이 있기에 비록 3국에 흩어져 지내지만 가족간의 유대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난 2003년 그녀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북한에 있는 아들들을 방문한다. 이제는 경제적인 여력도 없고 나이도 많아 다시 북한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 북한행도 큰아들이 자신의 장례비로 마련해 뒀던 돈을 털어서 보탰기 때문에 가능했다.

▲ 53년만에 찾은 고향 제주에서의 하룻밤과 북한의 아들을 방문했을 때 모습.
북한에 가서 차례대로 아들들을 만나며 건강과 가족간 화목을 당부한다. 북한에 남는 아들들은 "자유로운 왕래는 바라지도 않는다"며 "마지막 임종만이라도 지킬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이별 앞에 연신 눈물을 훔친다.

▲ 마지막일지 모르는 서로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다.
'해녀 양씨'는 재일동포 1세대의 삶을 통해 그들의 역사와 아픔을 보여준다. 7명의 자식들이 남한, 북한, 일본에 흩어져 살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가족적인 유대를 유지해 오는 양씨 할머니.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남한과 북한의 분단에서 비롯된 슬픔이 항시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고 오늘도 웃는다.

▲ 양씨는 가슴에 슬픔을 묻고 오늘도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낸다.
"이제는 아쉬운 것을 생각하기에 이미 늦었다"면서도 "그래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식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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