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치시엔 유스호스텔. ⓒ양기혁
시안역 앞의 성벽. ⓒ양기혁
시안역 앞의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로 먹은 만두와 죽 한 그릇. ⓒ양기혁
둔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황토고원. ⓒ양기혁
둔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황토고원. ⓒ양기혁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7 둔황으로 가는 길, 황토고원과 노자

 

▲ 밖에서 본 치시엔 유스호스텔. ⓒ양기혁

날이 밝자 짐을 챙기고 방을 나와 어젯밤의 소란스러운 열기가 사라진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즐기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그리고 거기서 보게 된 유스호스텔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곳이 유스호스텔연맹에 의해서 세계 10대 유스호스텔로 선정된 매우 특색있고 매력적인 숙소임을 알 수 있었다. 당나라 때인 서기 618년에 지어졌고, 중일 전쟁과 내전 시에는 홍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의 하룻밤 고대로의 여행은 춘추전국시대에서 당나라로 800여 년 앞당겨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유효했다. 내가 가진 가이드북에 시안의 숙소에서 이런 멋진 곳을 빠트렸다는 사실이 좀 아쉽게 생각되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아침 시내거리는 한산했고,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다. 이쪽 지방에는 이렇게 흐려 있는 날이 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구름이 떠다니는 맑게 갠 하늘이 아니라 항상 흙먼지로 가려져 있는 것 같이, 햇빛이 비치면서도 먼지의 막으로 한 꺼풀 가려 있는 듯한 우중충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게 된다. 깨끗해 보이는 돌계단과 길거리 곳곳에도 흙먼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시안역 앞의 성벽. ⓒ양기혁

그러나 어젯밤 숙소를 찾기 위해 긴장하며 숨가쁘게 걸었던 것과 달리 오늘은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기차역까지 느긋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역 주변에 시아오츠(小吃)라고 쓰여 있는 간이식당에서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고 만두를 하나 주문했다. 차이단(메뉴판)에는 만두 한 판에 6원, 죽 한 그릇에 2원이다. 팥죽처럼 보이는 묽은 죽은 흰 쌀죽같이 아무 맛도 없이 밋밋하다. 만두는 먹을 만했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 시안역 앞의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로 먹은 만두와 죽 한 그릇. ⓒ양기혁

다시 긴 기차여행에 대비하여 가게에서 음료수와 먹을 것 조금, 그리고 인스턴트 믹스커피와 종이컵을 챙겼다. 차를 즐기는 중국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이기에 기차역 대합실이나 기차 안에는 뜨거운 물이 항상 나오고 있었다.

기차역 대합실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행선지마다 떠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들에게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보였다. 대합실 벽의 대형 광고판에서는 머리에 화관을 쓰고 활짝 웃는 소녀가 세계원예박람회가 4월 28일 성대하게 열리고 10월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두 번째 기차여행은 한결 편안하고 익숙하다. 지난번보다 한 칸 내려온 침대칸도 편해졌고, 인스턴트 믹스커피이긴 하지만 뜨거운 커피잔을 앞에 놓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즐길 여유도 생겼다. 기차가 출발하여 잠깐 농촌의 푸른 들녘이 보이는가 싶더니 얼마 안 되어 누런 황토 고원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둔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황토고원. ⓒ양기혁

 

▲ 둔황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황토고원. ⓒ양기혁

오랜 세월 황토먼지가 쌓이고 쌓여 다져진 산과 마을, 황토흙을 뒤집어쓴 마을의 집들, 강도 황토물이고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산인지 거대한 황토흙더미인지 구분이 안 가는 언덕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황토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집을 짓고 황토흙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이 사람들 자체가 황토 먼지인 듯,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황토는 그들의 친구이고, 동반자이기도 했다. 이 메마른 고원 속에서도 황토 흙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모습들이 간간이 지나가기도 했다.

한 기차역에 이르러 기차가 속도를 줄이며 플랫폼으로 다가가는데 노인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기차가 가까이 갔을 때, 동상 밑에‘老子象’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놀랍기 도 했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아래칸 침대를 쓰는, 란저우에서 옷장사를 한다는 왕(王)에게 노자의 동상이 왜 여기에 세워져 있는지를 물었다.

그와 옆에 있던 친구가 똑같이 여기가 노자의 고향이며, 노자는 이곳 출신이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내 배낭 속을 뒤져 여행 중에 읽을거리로 가져온 신영복 선생의 책 ‘나의 동양고전독법’이라는 부제가 붙은《강의》를 꺼내 ‘노자’를 강의한 쪽을 찾아봤다. 거기에는 사마천이《사기(史記)》에 기록한 내용이 나와 있었는데,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주(周) 왕실의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는 수장리(守藏吏)를 지냈다.”라고 쓰여 있었다.

초나라는 양자강 유역의 남방국가인데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다섯 시간 넘게 달려온 한적한 시골 기차역인 이곳 깐수성 롱시라는 곳에 노자상을 세우고 그의 고향이라고 하니 그 연유가 궁금했다.

노자(老子)라는 사람과 그가 남겼다는 오천자《노자 도덕경》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설이 분분하여《강의》에서는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노자가 맹자 뒤 한비자 앞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나와 있고, 다른책에서는 맹자와 순자 사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 사마천이 기록한 그대로 동주(東周) 말, 즉 춘추시대 말기의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관(史官)이라고 한다.

▲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저작물인《노자》도 그의 일인 저작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도가(道家)를 따르는 무리들의 집단창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옛것을 의심하는 의고풍(疑古風)의 학문 경향이 팽배했던 20세기 초에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이 사기에서 잘 모르겠다고 한 것처럼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노자라는 인물이 어차피 생몰연대가 불확실하고, 실재했는지도 의심스러운 전설에 속하는 사람이고 보면 그의 출신지가 어디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일설에는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 80년이나 있다가 백발이 되어 태어나서 노자라고 한다고 하니 고개를 갸웃거리게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몇몇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여행계획을 얘기하며 농담으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함곡관(函谷關)에서 ‘노자’ 도덕경(道德經) 5천자를 남기고 푸른 소를 타고 서쪽 사막으로 떠난 노자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 중국의 서쪽 사막을 여행하려 한다고 했었다.

조금만 더 가면 황토고원이 끝나고, 사막이 시작될 텐데 이곳 ‘롱시’에서 동상으로 서 있는 노자를 만나고 보니 그의 흔적의 일단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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