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이 시인과 표성준 한라일보 기자가 쓴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여름언덕.255쪽)>. 표지는 탐라순력도 중 '호금연사'와 '산방배작'을 썼다. ⓒ제주의소리

김순이 시인·표성준 기자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로 유배문화 재조명  

‘묻혀진 옥, 숨은 향기 문득 몇 년이던가. 누가 그대의 억울한 푸른 하늘에 호소하리. 황천길 아득한데 누구를 의지해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조정철 ‘홍의녀지묘’ 中
 

▲ 김순이 시인과 표성준 한라일보 기자가 쓴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여름언덕.255쪽)>. 표지는 탐라순력도 중 '호금연사'와 '산방배작'을 썼다. ⓒ제주의소리

조선 정조 시절, 목사를 부임했던 조정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홍윤애에게 바치는 비문이다.  그는 500년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유배 생활을 했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3대에 걸쳐 유배 생활을 했던 비운의 사대부였다.

예부터 죄인에게 내려졌던 가장 큰 형벌 ‘유배’가 콘텐츠로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정작 유배인들의 생활을 뒷받침했던 제주의 여인들은 그늘에 묻혔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유배 중에 얻은 첩실과 그 소생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금기시했던 탓에 유배인들 끼리 주고받은 시문이나 유배 중에 쓴 글을 모은 문집에서나 언뜻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김순이 시인과 한라일보 표성준 기자가 이러한 흔적을 더듬어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로  발간했다.

임금 자리에서 축출된 광해군 등 왕족부터 김진구·정온·송시열·김정희 등 정치계나 사림의 거목 등 다양한 조선시대에만 약 2백여 명이 제주에 유배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적 배경과 가문의 위세에 따라 유배생활도 천차만별로 나뉘었지만 나라의 큰 죄인인 탓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이들은 생계를 위해 막걸리를 빚어 팔거나 지역 토호 딸과 정략결혼을 하기도 했다.

유배인들은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낯선 섬에서 유배생활을 돌봐줄 여인을 얻어 함께 지냈다. 육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과 풍속, 해독하려야 할 수 없는 사투리까지 유배인들에게는 여인의 존재가 절실했다.

‘남존여비’가 당연했던 조선시대에는 남자 혼자서는 식사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물 긷는 여자라는 명목으로 내연의 처를 얻어 지내곤 했다. 축첩을 용인하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에서 숨을 거둔 유배인들도 있었지만 유배가 풀려 중앙에 복귀하는 경우도 많았다. 살 부비며 여인과 자식들을 척박한 섬 땅에 둔 채 떠났다. 여인도 그들을 붙잡거나 따라 나서지 않았다. 혼자서도 살 수 있었기 때문. 제주 여인의 강인한 생활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본문에는 △간옹 이익과 김만일의 딸 △왕족 이건 형제와 제주 여인들 △김춘택과 석례 △조정철과 홍윤애 △박영효와 과수원댁 △김윤식과 의주녀 △김진구와 오진 △김정희와 예안 이씨 등의 이야기가 실렸다.

저자들은 머리말에서 “유배객들과 고락을 함께했던 여인들이야말로 스토리에 매혹적인 향기를 부여한다. 그때 그 여인들의 자취를 오늘에 불러냄으로써 제주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유배 문화에 대한 이해에 한 발자국 다가서고자 한다”고 밝혔다.

255쪽. 1만5천원. 여름언덕.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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