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4·3 문제 이의 제기할 것"

거짓말을 신문에 쓸 수 있어?

10일 15일 오후 5시로 예정된 4·3 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위원들이 입장하는 가운데, 4시 40분경 신용하(서울대 교수) 위원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조선일보>에 실린 나종삼(4·3위원회) 전문위원의 기고문 때문이었다.

"수정안 심사를 한 차례밖에 하지 않았다니, 명색이 공무원이 말이야. 회의 내용을 존중해야지.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신문에 쓸 수가 있어. 우리는 글을 쓸 줄 몰라서 가만 있는 줄 알아. 지금이 군사 독재 시절인 줄 알아!"

그러자 마주 앉아있던 유재갑(경기대 교수) 위원과 유보선(국방부 차관) 위원이 대응을 했다.

"거짓말이라뇨.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에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위원과 김삼웅(전 대한매일 주필) 위원이 맞불을 놨다.

"당신들이 출석을 하지 않은 것이지, 수정안 검토 소위원회 회의가 어떻게 한 차례만 열렸습니까. 말을 바로 하셔야죠!"

문제의 발단은 나종삼 전문위원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내용 중 "수정안 심사는 실제 10월 4일 달랑 하루뿐이었으며, 시간은 3시간 정도뿐이었다"며 "3시간에 350여 건의 수정 요구를 모두 토의할 수는 없어…대부분의 수정 요구는 심사도 해보지 못하고 부결처리되었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수정안 검토 소위원회 회의는 총 4차례게 걸쳐 열렸다.

4·3 보고서 작업을 해오며 내부에서 미묘하게 오갔던 신경전이 나종삼 전문위원의 돌출 행동으로 터지게 된 것이다. 십여 분 동안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그동안 우근민(제주도지사) 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민화합차원에서, 대승적 관점에서 결정"

장내가 정리되자 고건(국무총리) 위원장이 회의장에 들어왔다. 김점곤 위원의 사퇴로 새로 선임된 유재갑 위원이 먼저 소개됐다.

고건 위원장은 "위원 각자의 입장이나 견해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국민 화합 차원에서, 대승적 관점에서 오늘 안건을 결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당부하며 회의를 주재해 나갔다.

기자들이 회의장을 퇴장하고,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회의는 80분 예정이었다.

한광덕(전 국방대학원장) 위원이 십여 분 늦게 회의장에 도착했다.

"국가 과오 인정한 것"..."제주 사람들의 피해 보고서"

오후 6시 30분. 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4·3 보고서가 통과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위원들이 하나 둘 회의장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고서는 총 참석인원 17명 중 14명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당초 이날 회의에서 4·3 보고서가 채택되리라고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종삼 전문위원의 기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4·3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식 채택이 되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이의 제기와 보고서에 대한 원론적인 문제 제기로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김삼웅 위원은 "정부가 과거 국가의 과오를 인정하는 첫 보고서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창욱 위원은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차원의 보고서가 채택되어 기쁘다"며 "후속 조치들이 순조롭게 진행돼 제주도민과 4·3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가운데 갑자기 한광덕 위원이 "기자분들 어디 계십니까?"라며 기자들을 찾았다.

"총리가 일방적으로 날치기 통과했습니다. 민주주의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과시킬 수 있습니까?"

한광덕 위원은 '제8차 4·3회의 발표 내용'이라는 준비한 발표 자료를 기자들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죽을 때까지 4·3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보고서에도 새로운 내용이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런 식으로는 합의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이황우(동국대 교수) 위원이 "이황우, 사퇴합니다!"라고 밝히고, 이어 한광덕, 유재갑 위원도 사퇴 의사를 밝혔다.

유재갑 위원은 "이 보고서는 제주 사람들의 피해 보고서지 4·3 사건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재갑 위원은 결국 4·3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후 처음으로 참석한 회의에서 사퇴를 한 것이다.

한광덕 위원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자료는 ▲4·3 보고서 심의 과정에 문제가 있다 ▲4·3에 남로당 중앙당이 개입했다 ▲4·3 사건은 봉기가 아니라 무장 폭동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A4 6쪽 분량의 자료.

다음은 한 위원이 준비한 자료의 일부이다.

"직업 군인으로 반평생을 살았던 예비역 입장에서 볼 때 군·경에는 불리하고 인민 무장대에는 유리한 표현과 자료만이 반복됨으로써 당시 힘든 상황 하에서 폭동의 진압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군과 경찰의 선배들이 무자비한 학살자로 둔갑되는 현상이 밤잠을 못 이루도록 마음이 아팠다."

"이 책자를 읽게 되면 후세의 국민들도 4·3 사건 당시의 역사적 배경도 이해를 하고 앞으로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군과 경찰과 국민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도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어떤 교훈 도출도 가능해야 하는 것인데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국가 보고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3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내란일 수밖에 없고 범법자들의 일부에 대해서는 내란죄가 적용되었는데 내란을 봉기로 역사에 기록하는 정부가 지구상에 존재합니까? 조직적인 훈련으로 무장을 해서 경찰서를 습격방화하고 선거관리요원들과 지지하는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집단행위를 봉기로 본다면 앞으로의 유사상황 발생은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의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 보고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론을 펴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지 말라는 주장과 같으며 이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4·3 위원회의 기본임무는 4·3 폭동을 무장 봉기로 바꾸면서 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판결 받은 수형인들의 범죄까지를 없애주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 아니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과잉 진압으로 내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처형된 선량한 제주도민들, 우익계 민주인사들, 그리고 17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을 죽인 인민해방군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동조 협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처형되거나 수형인이 된 사람들을 가려내어 그들이 진정한 희생자로 인정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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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만 기자는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로 활동중이며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서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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