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  '근대건축유산' 낡은 건물 아닌 살아있는 교과서

 

▲ 지난 12월부터 철거 중인 제주시 삼도2동 옛 제주시청사와 1980년대 옛 제주시청사 전경(아래). ⓒ제주의소리

지난 세밑. 성탄을 며칠 앞두고 난데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958년에 지어진 옛 제주시청사가 54년 만에 허물어진다는 소식이었다. “낡은 건물 허문다는 데 뭐가 잘못 됐나?” 고개를 갸웃댈 수도 있겠다.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 인근에 위치한 옛 제주시청사는 해방 직후 1955년 9월,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지어졌다. 국내서 활동하던 건축가 박진후 선생이 설계를 맡아 제주에서는 최초로 시멘트 벽돌로 지어졌다. 당시만 해도 지역에선 몇 안 되는 근대건축물이다.

시청사 터는 조선시대까지 정치의 중심지였던 목관아를 옆에 끼고 있는데다 일제시대 세무서와 경찰서 등이 모여 있어 오랜 시간 제주시의 중심가였다. 읍에서 시로 승격되며 지어진 첫 건물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한창 뒤숭숭하던 근현대사 격변기에 지어진, 국내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띤다.

1980년, 이 모든 역사를 뒤로한 채 옛 제주시청사는 골칫거리로 내려앉고 만다. 제주시청이 현재 이도2동 자리로 옮겨면서 재일동포가 건물을 사 들이면서다.

옛 제주시청사 자리가 목관아지 문화재지구에 포함돼있어 고층건물을 지어올릴 수도 되팔 수도 없었다.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자니 보수·보강은 가능해도 철거가 금지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수년간 골머리 앓던 건물주는 끝내 건물을 허물기로 결정을 내렸다. ‘낡을 대로 낡아 태풍이 불면 기왓장이 인근을 덮치곤 했다’는 하소연에서 옛 제주시청사가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는 그저 낡은 건물이 허물어진다는 가벼운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수백 년 터를 지켜온 역사의 현장이 훼손되고 만 것이다. ‘지키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보다 더 크게 치밀어 올랐던 건 ‘몰랐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수도 없이 지나치던 건물이었지만 속속들이 얽힌 이야기까진 몰랐다. 그제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말을 실감하게 됐다. 낡아만 보이던 건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 제주는 중죄인을 유배 보낼 정도로 먼, 변방의 섬이었다. 그러다 일제 통치 아래 도시화와 산업화를 겪으며 근대에 들어서게 된다. 광복 직후엔 4․3사건이 터져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6․25전쟁이 치러지던 때엔 정치 사회 가릴 것 없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혼란과 격변 사이에서 수많은 건축물이 지어졌고 오늘날에도 섬 곳곳에 터를 지키고 있다.

건축양식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건축물에는 시대정신이 담겨있다고 한다. 한 채의 건물이라도 쉬이 여겨선 안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해방, 6.25사변, 산업화를 거치며 생겨난 그 모든 이야기가 건물마다 스며있다. 자본을 들이부은 오늘날의 도시에선 요술봉 휘두르듯 순식간에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다.

▲ 대구 근대골목투어 1코스 지도. 동산 선교사 주택과 청라언덕, 이상화·서상돈 고택 등 근대 역사·문화 자원을 중심으로 현재 5코스까지 개발됐다. (사진출처=대구 중구청 홈페이지 갈무리)

건물이 지닌 역사성과 문화성은 한번 잃어버리면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다. ‘보존’은 물려받은 유산을 오늘에 맞게 다시 쓰임새를 찾는다는 뜻이다. 단지 오래돼서 보존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틔워낸다는 데 있다. 지난 2008년 대구에서는 '근대골목' 조성해 2012 한국관광의 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곳 등에 선정되기도 했다. 관광과는 거리가 먼 공업도시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제주도에서 발간한 ‘제주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지역 근대문화유산은 총 214곳, 그 중 101곳이 건조물이다. 관청이나 업무 시설을 비롯해 종교, 상.공업, 의료, 주거시설 등 저마다의 쓰임새로 시대를 뒷받침했다.
 
2001년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되면서 제주지역에 퍼져있는 근대건축물도 조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고서가 작성되던 2003년 당시에는 현 제주시청사(옛 제주도청사)와 이승만 전 대통령 별장인 귀빈사를 비롯해 모두 11곳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의 옛 전경(위). 지난 2004년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폐허와 다름 없었다. 다행히 올해부터 제주시에서 나서 보수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 ⓒ제주의소리

지난해 말 까지 집계된 등록문화재는 모두 21곳. 수치상으로는 두 배가 늘었지만 10년 가까운 시간 이미 사라져버린 건물들도 여럿이다. 게다가 귀빈사처럼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어도 방치된 건축물도 있다. 굳이 고대 그리스 신화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꿰어야 할 보배가 서 말이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대문화유산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섬 곳곳에 흩어진 시간의 흔적들을 산책하듯 걸어볼 작정이다. 감히 초보 기자가 풀어헤칠 깜냥은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덤벼보기로 마음먹었다. 낡고 헌 건물이 아닌, 살아있는 교과서를 뜯어보기로 말이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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